스타우트 씨의 하이네켄

2013.10.22
© 윤이나

2013년 10월 22일 날씨 맑음
선글라스 판매가 대목을 맞이하는 11월과 12월을 앞두고, 일을 관두게 됐다. 다행히도 잘린 건 아니다. 높은 시급과 완벽한 복지로 ‘브리즈번 워킹 홀리데이의 꽃’이라 불리는 치킨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한창 일을 구할 때 이력서를 넣어놨는데, 이력서를 냈다는 것조차 까먹었을 즈음 연락이 왔다. 엄청 큰 공장이라고 하더니 그래서인지 과정이 까다로웠다. 얼떨결에 본 전화 면접 후, 1:1 면접과 신체검사를 거쳤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합격했으니 현재 고용주에게 일을 관두겠다고 이야기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 2주도 꽉 채워 선글라스를 팔다가 공장에서의 안전교육과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기까지 꼭 한 달. 나는 전 세계적인 치킨 프랜차이즈에 납품하는 너겟을 생산하는 라인 오후반에 들어갔다. 공사장에서 한 삽 뜬 다음 내가 전국의 고속도로를 만들고 아파트를 지었다고 허세를 부리는 이들처럼, 너희들이 먹는 바로 그 너겟이 내 손을 거쳐 갔다고 말하게 되려나. 한국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보험에, 연금에, 완벽한 세금 환급까지 받는 공장에 들어간 ‘공순이 언니’를 위해 아직 선글라스를 팔고 있는 친구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2003년 여름, “스타우트 씨의 하이네켄”
자이언트에서 7년간 일했던 언니가 관둔 지 일주일째다. 가게의 실질적인 매니저이면서 바텐더와 홀 서빙을 겸하는 ‘올라운더’였던 언니가 관뒀지만, 사실 큰 변화는 없었다. 난 자리가 별로 티가 안 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아주 바쁘지 않은 이상에야 두어 명의 인원으로 충분히 장사를 할 만한 규모의 가게였던 것이다. 사장님이 새로 뽑은 바텐더가 파트타임으로 주말에만 오게 되면서 평일에 바를 볼 사람이 없게 된 것이 단 하나의 문제였는데, 사장님은 생각보다 쉽게 문제를 해결하셨다. “평일엔 어차피 바 손님 별로 없으니까 방학 동안 이나가 홀 서빙 하면서 바 같이 보고, 홀은 사모님이 같이 도와주면 되겠네.” 왜죠? 묻고 싶었지만, 바를 보는 동안은 시급을 300원 올려서 3,300원을 주겠다고 덧붙이길래 냉큼 좋다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칵테일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일주일간 칵테일 레시피를 외우며 진이니 럼이니 하는 술들을 이렇게 저렇게 섞어가면서 적응하고 있는데 오늘, 스타우트 씨가 오신 것이다. 스타우트 씨는 보통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단골손님이다. 주문 외에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이 아닌 바에 홀로 앉아 국산 흑맥주를 병으로 주문해 세 병을 마신 뒤 돌아간다. 계절에 상관없이 검은색 모직 바지와 겨울 점퍼를 입고 수염까지 기른 모습에 늘 흑맥주만 마시니, 직원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그냥 그 맥주의 이름이 됐다. 아주 가끔 나를 손짓으로 불러 손바닥에 뭘 쓰는 시늉을 하는데, 그건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는 의미다. 그렇게 신청곡을 적어 내게 건네면 난 그걸 DJ 부스로 가져다주고, DJ 언니는 별로 없는 신청에 큰 감동을 하며 음악을 트는 것이 스타우트 씨가 왔을 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의 첫 주문은 당연히 스타우트였고, 나는 기본 안주와 스타우트 한 병을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홀 서빙을 할 때와 다르게 바로 앞에서 같이 있자니 무슨 말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손님은 왜 이렇게 없는지 홀에 나갈 일도 없어서 바 안쪽에 붙여놓은 칵테일 레시피만 들여다보다가 그가 첫 병을 비웠을 때, 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의 스타우트 첫 병이 비워진 것을 보고,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다음 스타우트를 그 앞에 가져다준 것이다. 그 순간엔 전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센스를 속으로 자화자찬했지만, 오산이었다. 스타우트 씨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손짓으로 나를 불러 내가 언제 스타우트를 가져다 달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크한 기운에 아뇨, 그건 아니고… 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버무리는 나에게 그는 혼내는 말투로 메뉴판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시킨 것은.

하이네켄이었다. 스타우트 씨가 안 어울리는 초록 병의 하이네켄을 마시는 사이, 온갖 일을 궁금해하는 소녀 같은 사모님이 홀에서 나를 불렀다. “이나야. 저 아저씨 무슨 일이래?” 자초지종을 들은 사모님은, 어머 어머 어머 어머를 연발하면서 아니 바텐더가 단골손님이 마시는 맥주를 외우는 걸 보면 고마워해야지 못 배워서 그렇다고 입을 삐죽였다. 아니 뭐 그렇다고 못 배웠다고 할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지만, 허름한 옷차림에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를 ‘노가다’ 아니면 ‘공장 막일’ 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며 낮춰보는 시선을 지적하며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소심한 한마디만 덧붙였다. “그래도 손님이잖아요.”

스타우트 씨가 공장에 다니든, 종로 어딘가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든, 그건 그냥 일이잖아요. 그리고 사람 일 모르잖아요. 사모님은 몰라도, 난 내가 앞으로 뭘 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뭘 하고 살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일하는 사람들을 그 일 때문에 나쁘게 보거나 낮춰서 보면 그건 좀 슬프지 않을까요. 스타우트 씨가 하이네켄을 마시고 낸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손으로 눌러 펴면서, 아까 삼킨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진짜,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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