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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음, 변하지 않고 성장하는 법

2013.10.25

KBS <비밀>의 강유정은 황정음이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막 검사가 된 애인 대신 감옥에 들어갔지만, 감옥에서 낳은 아이는 의문의 사고로 잃었고 유일한 가족인 아빠의 임종은 지키지도 못한다. 하지만 강유정은 죽은 아빠의 허름한 구두와 옷을 붙잡고 혼자 울지라도, 끝난 관계를 외면하며 출세한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을 만큼 용기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쓸쓸하게 “아빠, 다음 생엔 꼭 내 자식으로 태어나요. 내가 아빠 아빠 해줄게”라며 훌쩍이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여자. “넌 힘들면 꼭 그렇게 웃더라.” 교도소 동기 이자영(정수영)이 강유정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하는 말처럼, 강유정은 다 잃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이런 강유정이 애교와 장난기로 가득한 황정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유정의 옷을 입은 황정음은 더 이상 철부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연기가 완전히 새로워서 돋보이는 건 아니다. 특히 청승맞지 않은 눈물 연기는 SBS <자이언트> 이미주와 MBC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우리 때도 탁월했다. 이미주는 사랑하는 남자의 부모에게 헤어지란 구박을 받아 울면서도 끝까지 헤어진단 말은 안 했고, 봉우리 역시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할 땐 다 이겨낼 수 있단 듯 웃었다. 그녀들이 캔디처럼 울어도 답답하지 않았던 건, 황정음이 MBC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하이킥>) 때부터 보여준 장점이 발휘됐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당당함으로, 보는 이를 캐릭터 편에 서게 만드는 매력 말이다. <하이킥>의 정음이는 신상을 밝혀도 ‘떡실신녀’로까지 망가지면서 고달픈 인생을 드러냈다. SBS <돈의 화신> 속 복재인이 다이어트는 하지만 뚱뚱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예뻐 보이도록 한 것도 황정음이었다.


물론 그 당당함이 황정음의 연기가 과장된 톤으로 평가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정음은 통속극에 가까운 <비밀>에서 자신의 당당함을 조절하며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차분한 말투 속에 유지되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는 오랜 시간 한 남자를 위해 희생하면서도 그것이 능동적인 선택이었기에 행복한 강유정을 이해시킨다. 안도훈(배수빈) 대신 감옥에 들어갈 때 “후회 안 해. 후회는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우린 그렇지 않잖아, 오빠”라 말하며 흘리는 눈물이 당당하고 애틋한 이유다. 강유정의 눈물에는 늘 시련에 익숙한 고단함과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맞서 온 단단함이 묘하게 섞여 있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넘기려 하지만 여전히 어린 말괄량이였던 이미주의 성장통과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며 커 가는 MBC <골든타임> 강재인과도 다른 지점이다. 그동안 다소 과장된 연기로만 인정받았던 황정음은 이제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가장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장르를 완벽히 소화했다.

이번 작품으로 황정음의 연기가 일취월장했다거나 그녀가 어떤 장르도 소화해낼 만큼 변화무쌍한 배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강유정이 비싼 대접을 거부하는 아빠에게 잔소리할 때처럼, 높은 목소리 톤이나 애교 가득한 표정 등 기본 테크닉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역할을 맡든 자신의 색깔을 활용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도 <비밀>은 황정음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다. <하이킥>부터 메디컬 드라마 <골든타임> 등을 거치며 욕망에 솔직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악녀와 착하지만 답답한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 구조에 조금씩 균열을 내왔던 자신의 영리함을 확실히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황정음은 신파적 요소가 가득한 정통 멜로 <비밀>의 강유정마저 신선한 여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청승맞게만 하지 말라던 <비밀>의 감독에게 “자기식대로 발랄하게 해보겠다”고 했던 황정음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드라마를 선택하는 눈이 좋다거나 단순히 운이 맞았단 것만으로 황정음을 평가하는 건 그래서 불충분하다. 황정음의 선택에는 자신의 강점을 갈고 닦아 조금씩 입지를 넓혀 온 그녀의 영리함과 노력도 포함된다. 후회하지 않는 자신의 캐릭터들처럼, 앞으로도 황정음은 “작품을 할 때마다 꼭 성장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SBS <사랑하는 사람아>처럼 불안했던 과거를 지나 매 작품의 분위기와 캐릭터 사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여배우가 됐으니까. 지금도 황정음은 최고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장점을 보여준 황정음이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유형의 여배우가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지금까지보다 더, 그녀의 다음 선택을 기대하게 만드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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