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서 찾은 20분의 위로

2013.10.08
ⓒ 윤이나

2013년 10월 8일 날씨 맑음
“언니. 쉬는 날 집에만 있지 말고 골드 코스트도 가고 바이런 베이도 가고 아울렛 가서 쇼핑도 좀 하고 그래요.” 쉬는 날 뭐하냐는 말에 마감이라고 대답하는 나에게, 같은 일을 하며 친해진 동생이 정말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프로 선글라스 장사꾼이 된 이후 고정적으로 주중에 하루, 주말에 하루를 쉬게 되었는데 주중엔 한국 일들을 하고 주말엔 집안일을 하다 보니 당일치기 여행이나마 갈 시간이 당최 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11시도 되기 전에 잠들어 6시가 조금 넘으면 일어나 출근을 한다. 바르셀로나에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왔는데, 축구를 볼 시간도 여건도 허락되지 않는 일상이다. 여기에 1년 반째 머무르고 있는 나의 룸메이트는 원래 한국 떠난 지 3~4개월 정도 되면 그런 생각이 들게 되어 있다고 말해주었다. “30 dollars each, Two for 50!”를 외치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 쉬는 날에는 기차를 타고 아주 큰 해운대 같다는 골드 코스트라도 다녀와야겠다. 누구랑 가는지는 묻지 말길 바란다. 슬퍼지니까.

2009년 가을,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20분”
영화제 취재를 처음으로 경험했던 지난여름의 부천과는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이래서 다들 부국제(부산국제영화제), 부국제 하는구나. 감독, 배우, 영화계 인물들 인터뷰에, 무슨 개별 행사는 그리 많은지 마스터 클래스며, 이런저런 이름이 붙여진 감독과의 만남, 배우들의 무대 인사, GV 등등 꽉꽉 채워진 행사 시간표를 어떻게든 최대한 소화해야 하고 그사이에 영화도 봐야 하니 영화제 팀의 스케줄 표도 꽉꽉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나 씨, 이번 부국제 취재 함께 갈래요?”라는 편집장님의 제안에 “네! 네! 네네네!”하고 병아리반 친구들처럼 외친 것에는 후회가 없다.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사이트 홍보용으로 빌린 캠핑카도 타보고, 해운대 밤바다도 원 없이 보고, 자취생에게는 참으로 귀한 열흘 숙박과 식사도 만사 해결이고, 아침에 옵스 빵을 먹으며 커피도 한잔 할 수 있고…. 물론 앞으로의 날들을 위하여 좋은 점들이 뭔가 더 있을 텐데, 사실 지금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케줄 표가 꽉 찬 것은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그걸 기사로 쓸 시간이 없었다. 인터뷰의 경우는 녹취도 풀어야 하고, 녹취를 풀다 보면 내 걸걸한 목소리와 창피한 질문들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보니 잠깐씩 끄고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시간은 더 걸리고…. 그러니까 줄일 수 있는 건 잠자는 시간뿐인데, 저혈압과 늦잠의 아이콘인 나는 잠이 줄어들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어제는 녹취를 풀다가 그냥 앉은 채로 두어 시간을 졸고 말았다. 침이 흘러들어 간 키보드가 망가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아침부터 “녹취를 풀어놓으면 인터뷰가 되는 게 아니며, 그걸 다시 구성해서 하나의 ‘글’로 만드는 게 인터뷰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편집기자님의 조언을 들으며 글을 고쳐야 했다.

그래도 인터뷰가 가장 재미있다. 물론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오늘은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워낙 좋아하는 감독이다 보니 오늘은 내내 그 생각밖에 없었다. 이번에 상영되는 <공기인형>의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미리 스크리닝을 예약하고 아침 일찍 작은 화면에 영어 자막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에서 어떤 느낌을 받기도 전에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고레에다 감독 사이에 허락된 시간은 단 20분이었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사진기자가 먼저 사진을 찍고 떠난 뒤, 나는 가볍게 첫 질문을 던졌다. “보통 당신 정도의 감독이라면 라운드 인터뷰(여러 명의 기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진행하는 단체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개별 인터뷰를 하게 된 건가요?” 통역이 되는 중에도 질문을 마저 듣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고레에다 감독은 대답했다.
“당신의 눈을 보고 대화하고 싶으니까요.”

그 뒤로는 질문지에 빼곡히 적어둔 질문만 이어가는 대신 그는 나의 눈을 보고,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대화했다. 20분은 짧았지만, 그렇게 짧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쿄라는 대도시와 그 안에 있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감응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조금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그럴 때면 다른 세상의 사람들도 모두 고독하구나, 생각합니다.”
도쿄의 당신도, 서울의 누군가도, 지금 부산의 나도. 그러니까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 말은 혼자 생각만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오후에 따로 <공기인형>을 본 기자님의 문자가 와 있었다. <공기인형>의 공기인형 노조미(배두나)의 한자가 희망의 그 망(望)이라고.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부산에 오길 정말, 정말 잘했어.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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