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스타와의 은밀한 만남

2013.10.01
© 윤이나

2013년 10월 1일 날씨 맑음
선글라스 판매 일을 하게 된 이후로 늘 아침이면 날씨로 그날 매상을 가늠한다. 당연히 날씨가 맑고 더울수록 장사가 잘된다.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낀 날이면 오늘은 매장 청소나 하고 오겠구나,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지난주 월요일, 거의 한 달 만에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장사가 잘됐다. 사장이 그날 여러 군데의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보내는 단체 문자에 “이나가 1등이야. 다들 어서 이나를 따라잡아!” 같은 내용을 보내며 판매를 독촉할 정도였다. ‘Rainy Day’ 특별 할인에 들어간 오후까지 무난히 잘 팔아 매출 1등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는 길, 사실 난 세일즈가 천직인데 삼십 해 동안 다른 일을 더 잘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산 건 아닌지 꽤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한국에서 한 달간 외고를 써서 벌던 돈을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바짝 선글라스를 팔면 벌 수 있으니 말이다. 날씨가 정말 좋은데 사실 날씨만 좋은 브리즈번에서, 그 유일한 장점마저 사라진 비 오는 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빗물이 차창을 두드리듯 머릿속을 톡톡 두드렸다.

2008년 겨울, “월드스타와의 은밀한 만남”
월드스타가 나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새로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홍보 겸 그 과정을 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롭거나 말거나, 알바 자리가 나는 건 좋은 일이다. 게다가 프리뷰는 방송작가 일을 할 때도 자주 했던 것이고, 좀 지루해서 그렇지 별로 힘이 들 일도 없지 않은가. 주에 이틀 정도, 2주 정도 가서 프리뷰를 하고 작가 시절 주급(그렇다.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25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아주 괜찮았다. 그리고 언론고시 2년 차로서 편집실이란 어찌 됐건 꿈의 공간인 것이다. 단지 허세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구식 편집 기계로 조그 셔틀을 돌리거나 되감기와 빨리감기, 재생 버튼을 소리 나게 누르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난 작가 일을 할 때 산 무지하게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케이블 방송사들이 모여 있는 상암동의 한 건물에서 프리뷰를 시작했다. 보통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프리뷰란, 편집되지 않은 원본 테이프를 보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문서로 옮기는 작업을 의미한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오디오를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인터뷰라면 “작가: 월드스타 OO씨에게 이번 도전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월드스타: 도전은 저의 삶이죠” 이런 식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골라 방송을 구성하고 만드는 것이니 당연히 원본은 지루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큰 예능적 재미나 장치가 없는 리얼리티에,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인 월드스타 덕분에 지루함은 배가 되었다. 쓸모없는 데 완벽주의가 발휘되는 나의 이상한 성격까지 합쳐져 잘 안 들리는 부분을 집요하게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아주 작은 개인 편집실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아니, 이대로는 큰일인데. 정해진 시간만 일하는 게 아니라 당일에 할당된 테이프를 끝내면 되는 거라 만만하게 봤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시급이 예전 서빙할 때보다 적을 것 같아서 서두르기 시작할 즈음, 옆 편집실이 왁자지껄해졌다. 모회사는 같지만 다른 채널의 한 예능 프로그램 편집이 시작된 것이다. 깔깔 웃는 소리에 어쩐지 부러워져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살짝 들여다보았더니 우연히도 다른 방송에서 잠시 일을 같이 한 적이 있는 FD가 거기 있었다.

“어머, 작가님. 이것 좀 보세요!”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인사도 생략한 그는 나를 편집실 안까지 끌고 들어갔다. 택시 안에서 진행되는 토크쇼가 한창 편집 중이었다. 화면 속 그날의 게스트가 흥분해서 어떤 말을 하던 와중 육두문자를 내뱉었고, 그 타이밍이 하도 절묘하여 모두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웃겼다. 돌리고 또 돌려봐도 계속 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하루 종일 지루함을 온몸으로 체험 중이던 나는 웃을 기회가 왔을 때 몰아서 웃겠다는 심정으로 더 크게 웃었다. 한참을 함께 돌려보며 웃은 뒤에야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아니 근데, 저렇게 웃기지만 일단 욕이잖아. 저걸 내보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요. 저걸 삐- 처리를 해서 내보낼지, 아니면 그냥 자를지 지금 고민 중이에요.”
“삐- 처리를 하면 지금처럼 안 웃길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결국 중요한 것들은 잘라버린 곳에, 삐- 처리가 되어 들리지 않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월드스타의 인터뷰 역시 자신만만한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꺼리’를 만들어내려는 작가의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하는 그의 곤혹스런 표정에, 결국 잘라버리고 말 재미없는 수많은 테이프 안에 진짜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구석의 작은 편집실로 돌아갔고, 다시 재미없는 그의 말을, 홍보성 멘트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들리는 말에 집중하기보다는 홍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한 게 숨기려 해도 자꾸 티가 나는 그의 표정에 집중하면서. 확실히 이전보다는 덜 지루했다.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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