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연 “‘circle of life’라는 말을 이제야 요만큼 알겠다”

2013.09.13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닥에 털썩 앉는다. 분칠이 전혀 되지 않은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침묵 속의 공기를 순식간에 잡아끌어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차지연은 그런 사람이다. 기존에 했던 것보다는 새로운 것,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다. 제 기를 송두리째 캐릭터에 불어넣고 정작 본인은 앓아눕는다. 삶이 작품에 잠식되어 버린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명성황후가 된다. 게다가 진짜 얼굴을 알 수 없을 만큼 명성황후의 다양한 표정을 그릴 거라고 한다. 그 고통이 벌써부터 가늠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차기작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예견하는 길로는 안 가고 싶어요. 재미없으니까. 어려운 길이 남더라구요.” 이 여자, 여전히 못 말린다.

4월까지 했던 <아이다>와 9월 22일부터 하는 <잃어버린 얼굴 1895>(이하 <잃어버린 얼굴>)은 여러 부분에서 비슷하다. 둘 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나라의 공주와 황후고, 굉장히 많은 짐을 진 여자들이다. 왜 이렇게 힘든 배역만 하나.
차지연
: <서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매번 진이 쫙쫙 빠지는 캐릭터를 했다. 명배우 코스프레 하는 것 같아 창피하지만 심리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꾸만 픽픽 쓰러진다. 근데 내가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에너지를 풀로 다 쓰고 소모시키는 것. 그렇게 해야 뭔가 시원하다. 사람인지라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에너지를 아끼게 되는데 그런 날은 꼭 후회를 한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웃음)
차지연
: 이번이 <서편제>에 이어 이지나 연출님이랑 두 번째 작업인데, 많은 여배우들이 용기내지 못할 도전을 해야 되는 게 나의 역할이고 그게 또 내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도 많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지금은 소속사를 나왔지만 더 좋은 회사 찾아서 인지도 더 쌓고 몸값 올려서 빡빡빡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늙고 지치는데 그 끝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좋은 집? 좋은 차? 그런 것들에 급급했던 사람의 최후를 관객은, 스태프는 뭐라 기억해줄까. 그게 나한테는 굉장히 슬프게 다가왔다.

그런 마음을 먹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
차지연
: 알겠지만, 난 키와 체격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다. <아이다> 때 남자 주인공보다 얼굴이 더 커서 집중이 안 된다는 후기를 본 적이 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굉장히 심한 얘기다. 그래서 실은 돈을 모았다. 공연 끝나면 뼈 깎으려고. 그런데 거울을 보다가 노래하는 사람이 공명기관이 바뀌는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이걸 해야 되나 싶었다. 과감히 접고 그 돈으로 뉴욕에 가서 공연 12편을 보고 왔다.

원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낮은 편이지 않았나.
차지연
: 지금은 조금씩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다 귀찮아서 그런가? 피곤해. (웃음) 그냥 다 부질없는 일이다.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을 텐데 아등바등 하는 게 얼마나 웃길까. 어항에 물고기가 하나 있는데 그걸 깨겠다고 계속 부딪혀도 어항은 깨지지 않는다.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씩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조바심도 많이 없어졌다. 가끔 안 좋은 후기를 본 친구들이 걱정 돼서 전화할 때가 있는데, 그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면 됐어”라고 말한다. 내 사람들이 내 편이면 됐다. 많이 필요 없는 것 같다. 있는 것만이라도 잘 지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2011, 2012년에 MBC <일밤> ‘나는 가수다’나 KBS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등 무대 밖의 일을 많이 했는데, 그것들이 가져온 심경의 변화도 있을까?

차지연
: 가수로 꿈을 키워왔는데 밖의 일들을 하면서 오히려 가수에 대한 열정이 많이 없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뮤지컬배우가 가수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겠어 하지만, 나가보니 너무 많은 차이가 있더라. 배우들은 흰 바탕에 역할의 색이 입혀서 나오는데 그쪽은 너 무슨 색이야? 부터 시작한다. 난 그게 굉장히 스트레스였고 부담이었다. 색을 만들어오라고 한 건 아니다. 다만 예를 들어 어떤 곡을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A가 부르면 이런 색이 나오겠다고 예상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게 그 가수의 색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보니 너무 죄송스럽지만 그 시간은 부담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 드라마나 상황이 있고 그 안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게 편하다는 걸 알게 됐다.

3년 전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끌어준 뮤지컬에 대한 의리를 얘기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나?
차지연
: 뮤지컬배우가 되기도 쉽지 않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뮤지컬만으로는 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쪽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내고 만들면 분명 길은 있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혼자만 가져가야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인드도 굉장히 바뀌어서 더 나누고 있다. 그렇게 출중하고 실력 있고 단단한 인물들로 견고하게 쌓여 있어야 타 매체에서 넘어오기가 쉽지 않을 거다. 강의를 나가서도 더 적극적으로 극적인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본인의 무기는 무엇인가?
차지연
: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날 쓰지 않을 거다. 내가 김종욱을 찾으면 김종욱이 무서워서 도망갈 거고, 나영이를 하면 솔롱고는 키가 190cm는 되어야 된다. 서장훈 씨 오셔야 된다. (웃음) 이건 바꿀 수 없으니 일정부분은 포기했다. 나한테는 남들 같은 미모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없어서 오히려 더 다른 가능성이 있다. 실험적이고 독특하고 강하고 찡하고 색이 짙은 것. 그게 나랑 맞는다. <잃어버린 얼굴>도 그래서 새로운 도전이다. 뭔가 하나씩 배워서 내 무기를 장착해나갈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과거 국악을 하는 집안환경이 싫어서 더 반대편으로 움직였는데, 지금 당신의 가장 큰 무기가 바로 그 한국적 소리가 됐다. 오랫동안 외면하려 했던 노력이 억울하진 않나.
차지연
: 그렇진 않다. 다만 정말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이라는 게 있는가 싶다. ‘circle of life’라는 말을 이제야 요만큼 알겠다. 나에게 북은 너무 아픈 기억이라서 뮤지컬 무대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물놀이도 아니고 그 고법북을. 두 번 다시 칠 일이 없겠지 했는데 <서편제> 때 내 눈앞에서 딱 마주쳤을 때 ‘어쩔 수 없는 게 있구나’ 했다. 그럼 받아들여야지. 나이 들어서 소리를 들으니 북 치는 맛도 생기고 재밌었다. (이)자람 언니가 가능성이 있다며 아예 한 바탕을 사사 받아서 완창을 해보라고 할 정도였다. 어때 멋있지? 하길래 순간 훅하기도 했고. (웃음)

한국적 정서라는 부분에서 <잃어버린 얼굴>과 <서편제>가 비교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차지연
: 많은 부분이 달라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데, 구음은 좀 고민이다. <서편제>랑 달라야 하는데 내가 기계도 아니고 너무 어렵다. 관객들이 ‘또 저거야?’ 할까 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소리길을 쓰되 음계 스케일은 반음씩 써서 이국적인 소리를 내는 것 정도다. 근데 또 모든 노래를 그렇게 하면 작품 속 씬과 붙지가 않는다. 나는 미세한 차이를 느끼지만 관객들은 똑같이 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지점이 가장 겁난다.

반면 명성황후라는 소재는 이미 드라마나 뮤지컬이 있어 그것과도 차별을 둬야한다.
차지연
: 이 작품으로 역사 공부를 갑자기 미친 듯이 벼락치기로 했다. (웃음) 정말 무식한 얘기지만 “내가 조선의 국모다” 이거 하나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명성황후의 선행이 하나도 없더라. 총명하고 영특했으니 분명 좋은 지점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래서 <잃어버린 얼굴>에서는 기존에 소개된 작품과는 다르게 명성황후의 표독스럽거나 잔인한 부분들을 다 펼쳐놓은 상태라 질타를 많이 받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것도 역사고, 이건 또 하나의 작품이니까.

표피적으로 봤을 때 악역의 느낌인데, 그동안 악역은 한 적이 없지 않나.

차지연
: 악역이라는 것보다 참는 캐릭터라는 게 힘들다. 전작들은 대부분 밖으로 터뜨리고 발산하는 역이었다. 그게 이 작품에서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삭히는 게 더 많아 꾸역꾸역 담다보니 체하고 토하고. (웃음)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신나도 감춰야 하고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거기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혼자 손가락질을 다 받아야 되고. 독하고 강한 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굉장히 여리고 연약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동정을 받고자 하는 것도 동정에 호소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도 한 인간이고 당신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비슷한 일을 했을 거다, 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같은 거지.

역시 1인자는 힘든 것 같다. (웃음)

차지연
: 나는 멘탈이 약해서 그렇게 못살았을 것 같다. 탑이라는 위치 때문에 대가를 너무 끔찍하게 지불했고, 옷도 너무 무겁다. 이걸 어떻게 입고 살아. 가채도 너무 힘들다. 솔직할 수도 없고, 혼자 있을 때도 제 맘대로 못한다. 내 생각에는 명성황후가 정말 강한 인물이었다면 다 놓고 자살했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나약함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있었기 때문에 발악하며 끝까지 버티지 않았을까. 역시 인생은 2.5인자 정도로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래야 오래 살 수 있다. (웃음)

창작초연, 원캐스트, 서울예술단 공연 등 이번에 처음 하는 게 많다.
차지연
: 직접 대사나 가사를 써봤는데 재밌었다. 사람들은 ‘왜 배우가 그런 것까지 해야 되나 주는 것만 잘하면 되지’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것도 맞다. 근데 창작에서만큼은 외국에 비해 제작 기간이 굉장히 짧기 때문에 마음을 좀 더 열고 같이 만들어야 될 것 같다. 내 대사, 가사를 쓰면서 그 상황을 더 연구하고 인물을 파고드는 거라서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됐다. 괴롭긴 하지만 한번쯤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장성희 선생님 글에는 힘이 굉장하더라.

그렇게 만난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이던가.
차지연
: 일단 여자로서 너무 안쓰러웠다. 민자영은 한마디로 시아버지가 자기 입맛에 맞게 심은 인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정치판에 들어왔을 때 굉장히 피폐해지지 않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얼굴을 쓰는데 명성황후도 살기 위해 그랬을 거다. 자식을 넷이나 잃었는데 하나 남은 그 아이가 얼마나 소중하겠나. 고아에 남편에게 사랑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너무 외롭고 고립된 인간이었다.

모성이라는 지점은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인데 이해가 어렵진 않던가.
차지연
: 난 아마 시집 못 갈 것 같다. (웃음) 예전에는 연애? 결혼? 아기? 이런 걸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슬슬 나이 먹어가고 현실을 보니까 내 스스로가 자신이 없더라.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희생할 만큼 내가 단단해지지 않은 것 같다. 같이 불행해지고 싶지 않은 거다.

배우가 아닌 일반인 차지연으로 보면 민초들의 삶에 더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사이 부딪히는 면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차지연
: 해결 안 난다. (웃음) 정치를 잘 모르지만, 요즘 세상이 많이 미쳐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새 세상을 꿈꿔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 회의감도 드는데, 역사를 보다보니 이건 너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을까, 신이 있다면 이런 결말이라는 걸 알 텐데 왜 우리를 그냥 두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왜 재벌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재벌인가. 그럼 잘못 태어난 걸 탓해야 되는 건가. 나는 누가 이곳에 데려다줬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웃음) 완전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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