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응답하라 한국 근현대 경제사

2013.08.19

SBS <황금의 제국>의 최민재(손현주)는 KBS <야망의 세월>(1990)의 박형섭(유인촌)을 닮았다.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이 건설회사 평사원으로 입사해 중동 건설 사업을 이끄는 탁월한 능력과 회사를 향한 헌신으로 고속 승진한 끝에 마침내 재벌 총수에 오른다는 성공 신화를 그린 <야망의 세월>의 주인공 박형섭은,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모델 삼아 6, 70년대의 코리안 드림을 상징한 캐릭터였다. 그와 달리 <황금의 제국>의 최민재는 성진그룹 부회장 최동진(정한용)의 장남이지만, 그런 그도 큰아버지 최동성(박근형) 회장 일가에 비하면 ‘마부’의 자식에 불과하다. 1979년 계열사 대리로 입사해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서 2년, 내전이 벌어지는 이라크 사막에서 송전탑 공사 3년을 마친 뒤 과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5공 청문회에 불려 가 사촌 형 최원재(엄효섭)가 조성한 정치자금 때문에 옥살이할 위기도 겪는다. “노조 간부 매수하고 택지 비리로 조사까지 받았어. 정치꾼들 비위 맞춰서 땅 사고, 공무원들 장단 맞춰서 허가받고, 살아보겠다고 버티는 놈들 강제 철거해 경찰에 용역까지 썼다. 사람이 다치고 사람이 죽어도! 성진건설을 위해서, 성진그룹을 위해서!” 15년 동안 경제 발전의 첨병으로 몸 바쳐 뛴 그의 손에 남은 것은 피와 먼지다.
 
그래서 최민재는 최동성의 딸 최서윤(이요원)이 그룹 내에서 자신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열 살 생일선물로 최동진 삼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지분을, 대학 졸업선물로는 계열사 두 개를 받고 자신이 대리로 출발했던 성진건설에 상무로 첫 발령을 받았던 최서윤에게 그는 묻는다. “그걸 가지기 위해 땀 한 방울이라도 흘렸냐”고. 그러나 최서윤은 최민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흘린 땀과 얻을 수 있는 부(富)가 정확하게 비례했던 적은 없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모은 돈으로 가게 한 칸을 겨우 얻었지만, 신도시 개발로 권리금 5,000만 원을 통째로 떼이고 쫓겨나게 된 장태주(고수)의 아버지 장봉호(남일우)는 철거 현장에서 저항하다 화상으로 사망하는데, 평생 정직하게 땀 흘려 살아온 그의 목숨값은 단돈 500만 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7년 후, 부동산 사업가가 된 장태주는 IMF를 맞이하며 선언한다. “이제 돈의 전쟁입니다. 많이 가진 놈이 결국 다 먹는 판.”

<야망의 세월>이 시멘트 가루 맛을 남기던 시대의 이야기였다면, <황금의 제국>을 통해 본 1990년대는 이미 주식과 부동산의 시대다.

부동산과 주식, <황금의 제국>의 후계자 전쟁은 이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땀이 아니라 돈의, 제품이 아니라 서류의 싸움이다. <야망의 세월>에서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갔던 박형섭은 성난 현장 인부들에게 맞서 회사 금고를 지켰고,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개발 독재의 어두운 이면을 그렸던 SBS <자이언트>(2010)의 이강모(이범수)는 매립지를 메울 토사가 부족하자 연탄재를 활용하거나 하도급 업체의 담합을 입증하기 위해 자재 장부를 입수한다. 이렇듯 6, 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그린 드라마가 개인이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돌파, 사업을 수주하며 성공의 계단을 밟아나가는 입지전에 가까웠다면 지난 몇 년 사이 등장한 드라마에서 성공 혹은 승리는 개인의 성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KBS <남자 이야기>(2009)의 김신(박용하)은 주가조작으로 자신의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채도우(김강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식 전쟁을 벌이고, SBS <마이더스>(2011)의 김도현(장혁)은 자신을 배신했던 인진그룹 후계자 유인혜(김희애)를 밀어내기 위해 비밀리에 계열사 주식을 매입한 뒤 적대적 M&A를 선포한다. MBC <로열패밀리>(2011)에서 재벌 총수 공순호(김영애)와 며느리 김인숙(염정아)은 지주회사 변경 문제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며 주식과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전투 양상을 그렸다.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은 90년대이면서 이야기의 성격은 현재형에 가까운 <황금의 제국>은 주주총회를 최대 전장으로, 부동산 시장을 초대형 도박판으로, 외화 보유액을 최종병기로 활용하며 긴박감을 끌어올린다. 전쟁고아 출신으로 군 하사 시절 빼돌린 기름을 팔아 형과 함께 80평짜리 시멘트 공장에서 시작했던 ‘창업주 세대’ 최동진은 아들과 최서윤에 대해 둘 다 “시멘트 가루 맛은 모르고 돈맛만 안다”고 평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최민재는 최동진과 ‘대주주 세대’인 최서윤 사이에 있는 ‘공사판 세대’다. 이들의 대립에 끼어든 성진그룹 사람들, 그리고 장태주가 합류한 게임에서 룰은 오로지 이기기 위한 모든 것이다. 대출 확인서에는 쓰여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4,500억 원, 지분 싸움을 위한 유상증자, 차명주식 가로채기 등 법망을 피한 페이크도 잇따른다. 10년 전, SBS <요조숙녀>(2003)에서 신영호(고수)가 게임 품평회에서 문동규(손창민) 상무 측을 이겨 회사의 후계자가 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했던 설정을 떠올리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황금의 제국>은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 ‘회사의 주인은 나’라는 공식의 판타지가 힘을 잃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주주 자본주의 시대가 개막하기까지 용광로처럼 들끓던 자본의 욕망을 무섭도록 치밀하게 추적해왔다. 공권력까지 끌어들인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마흔두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 그룹을 키워낸 최동진이 고도 성장기의 쾌감을 추억하면서도 “험한 세상 살아왔다. 하루하루 돌아보면 먼지도 묻고 피도 묻은 손이었다”며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거품이 부풀어 올라 터진 뒤 그 잔해가 흩어지는 광경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면에서 <황금의 제국>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에 대한 <응답하라 1997>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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