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배우 김준수의 생존비기

2013.08.22

미끄러지듯 들어와 거친 숨소리를 뱉는다. 나른하게 속삭이며 달팽이관을 자극하다 이내 광기 어린 웃음으로 모두를 긴장케 한다. 깍듯한 인사 끝에 불현듯 손목을 낚아채 강하게 끌어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갑게 밀쳐낸다. 걸음걸이에는 묘한 리듬이 있고,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난다. 얼핏 담장을 넘는 뱀 같다가도 새하얀 목덜미를 스스로 내어줄 만큼 유혹적인 뱀파이어 같기도 하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샤토드’ 말이다.

방송은 카메라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원하는 부분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반면, 모든 것이 오픈된 무대는 숨을 곳이 없다. 객석에서 내뿜는 수천 명의 기를 받아낼 배짱과 조명, 무대세트 등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을 무대가 필요로 하는 이유다. 뮤지컬배우에게 요구되는 조건 중 제법 큰 영역을 차지하는 무대 장악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죽음’(이하 토드)이 가진 ‘유혹’이라는 키워드는 같지만, 김준수는 소위 ‘뮤지컬’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성대를 눌러 담아내는 소리는 답답하고,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는 때때로 귀에 거슬린다. 시대를 드러내는 의상을 입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걷지도 않는다. 뮤지컬을 오랫동안 봐온 이들이라면 충분히 불편하다. 하지만 그는 그 불편함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여기에는 동방신기, JYJ, XIA로 다년간 활동한 경험이 투영됐다. SMP는 다양한 콘셉트를 소화해내는 능력을 길러줬고, 글로벌한 팬과의 만남은 가사보다 무드의 중요성을 일깨워줬으며, 동료는커녕 그 흔한 게스트도 없이 홀로 선 무대는 관객의 집중력을 어떻게 나눠 쓸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그의 토드는 가사에 비주얼과 창법, 움직임이 더해졌을 때 완성된다. 2012년 초연에서 보여준 블랙네일은 올해의 핏빛네일로 이어졌고, 흑발과 죽음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아이 메이크업 역시 노력의 결과물이다. 토드의 대표 넘버인 ‘마지막 춤’의 경우 뮤지컬이라기보다는 4분짜리 아이돌 그룹의 방송 무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토드가 초월적 캐릭터이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벳>은 마지못해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여자의 일생에서 죽음을 주요 모티브로 선택한다. 끊임없이 자유를 꿈꾸던 엘리자벳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죽음을 갈망했고, 그녀를 암살한 루케니는 극의 해설자로 전면에 나선다. “황후가 ‘죽음’을 데려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아들과 딸을 비롯해 주변의 지인들이 수없이 죽어갔고, 19세기 오스트리아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가 칭송받던 곳이기도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해무처럼 늘 깔린 죽음이라는 존재감 그 자체이고, 초연에 이어 ‘샤토드’의 아우라는 강하고 무겁게 무대를 감싼다. 김준수가 만든 토드가 지난 21년간 <엘리자벳>이 공연된 11여 개의 국가 중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only one’이 된 이유다. 전혀 다른 경험이 전혀 다른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과정. 옥주현이 철저히 클래식한 뮤지컬의 작법을 따르며 뮤지컬 무대에 안착한 것과는 달리, 김준수는 자기가 가진 다양한 무기를 작품에 맞게 꺼내놓고 그것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방법으로 무대에 선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김준수가 뮤지컬과 가요에서 둘 다 생존할 수 있는 절대비기다.



김준수는 1년 전 열린 < XIA Ballad&Musical Concert with Orchestra >의 오프닝 곡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하 < JCS >)의 서곡을 선택했다. 스트링과 일렉 기타의 사운드가 버무려지고, 예수가 ‘인간’이었음을 부각한 스토리가 발칙하게까지 느껴지는 작품. 성악 발성 대신 비명에 가까울 정도의 고음 피치가 계속되는 바람에 러닝타임도 짧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클래식한 특성을 모두 비틀었지만 < JCS >는 1970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김준수는 이런 점에서 < JCS >를 연상시킨다. < JCS >가 여전히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작품이듯, 김준수는 대체 불가능한 성격을 가진 뮤지컬배우이기에 가치를 가진다.
 
자신만의 방법을 지닌 김준수가 뮤지컬배우로서 가진 장점과 한계는 명확하다. 보컬은 다소 과하게 느껴지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노래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 목소리와 톤, 호흡을 모두 이용한 창법은 극적인 캐릭터와 상황, 판타지로 뒤덮인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썩 잘 어울린다. 그래서 김준수가 할 수 있는 영역은 명확하다. 레플리카 프로덕션(대본과 음악, 무대까지 모든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버전)이 아니거나, 레플리카 프로덕션이되 기존의 작법을 비틀거나. <엘리자벳>이 프로덕션별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었기 때문에 ‘샤토드’가 태어날 수 있었고, 모차르트가 드레드에 청바지를 입고 빈을 누비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샤차르트’가 주목받을 수 있었다. 모두의 찬사를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계가 있으면 또 어떤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유일무이한 캐릭터 ‘샤토드’ 하나를 얻었는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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