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서랍 속의 VHS 테이프

2013.08.20
© 윤이나

2013년 8월 20일 날씨 맑음
호주에 온 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한국 방송을 보는 일이다. 관련된 일을 하는 만큼 필수적인 부분인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물론 청탁은 지난달로 뚝 끊겼지만, 그건 모른 척하고 계속 보고 있다. 이전에는 뭘 해외까지 가서 한국 방송을 챙겨보나 했었는데, 하루 종일 영어에 시달린 귀를 쉬게 해주는 데는 한국 예능만 한 게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인터넷이 느려도 너무 느리다. 그나마도 이사한 집에 3주간 인터넷 설치가 되지 않아 몇 주 동안 나를 위로하는 할배들과 아이들, 그리고 칼라바 친구을 보지 못했다. 할배들은 스위스까지 잘 가셨는지, 민율이는 형아랑 싸우진 않았는지, 칼라바와 올포원의 대결은 어떻게 되었는지, Mnet <슈퍼스타 K>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는데 올해도 날 낚을 수 있을지…. 실시간으로 볼 수 없으니 자연히 발생하는 시차에 어쩐지 뒤처진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TV의 타임머신 기능 같은 걸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그런대로 멋진 것도 같다.

2009년, 봄. “타임머신도 부럽지 않아!”
벌써 모니터링 일을 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잠깐 용돈을 버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고정 수입이 없다 보니 도저히 놓을 수가 없다. 나름대로 필기시험이라는 걸 본 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본방송을 놓치게 되는 것이었다. 워낙 낮과 밤이 바뀌어 생활하다 보니 새벽 방송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중고 가전제품을 파는 데까지 물어물어 찾아가 낡은 VCR 플레이어를 사다 주셨다. 하남의 집에서 화곡의 옥탑방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 가며 그 VCR과 비디오테이프들을 들고 와 지난 1년 동안 쏠쏠히 사용했다. 물론 MBC < god의 육아일기 >를 비롯해 온갖 가요 프로그램 녹화분 위에 KBS <6시 내고향>이니 <남북의 창> 같은 프로그램에 덧씌워지는 일은 아쉬웠지만, 요새는 공테이프를 구하는 것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방송국의 모니터링 요원이 되면 한 달 정도 단위로 시간대를 할당받게 된다. 그 시간대에 특정 채널의 프로그램을 보고 대강의 내용을 기록한 뒤 프로그램의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평가하고 혹시라도 방송법을 위반한 사항은 없는지, 자막 오기는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모니터링 요원의 일이다. 요원들은 방송국의 심의평가부 직원들과 함께 두세 달에 한 번씩 간담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갖는데, 지난 모임에 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요원들의 대부분은 나를 포함한 두어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가정주부인데, 그중 한 명이 자신은 새로 산 TV의 타임머신 기능과 자체 녹화 기능을 이용해 모니터링을 한다고 말해준 것이다. 과연, 스마트한 세상이 도래하고 있었다. 물론 옥탑방에서 18인치 브라운관 TV를 보는 내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내 낡은 VCR 플레이어의 최신 기술은 예약 녹화에 머물러 있었다.

타임머신을 탈 수 없는 나는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실시간으로 TV를 본다. KBS <낭독의 발견>을 보는 날이라 일부러 늦은 시간에 헬스장에 왔다. 러닝머신 위에서 방송을 보고 집에 가서는 예약녹화 해둔 방영분을 확인하면 일이 쉬워진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15분 전쯤, 나는 러닝머신에 올랐다. 오늘의 게스트는 개그우먼 박지선이다. 그녀는 소설 <무진기행>의 일부와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 쓴 편지를 낭독한 뒤,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를 불렀다. 내가 제자리를 걷는 동안 그녀는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노래했고 화면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가 흘러갔다. “가라앉지 않는 바람처럼 내 생각은 우편함 속에서 떠돌아요. 눈먼 사람처럼 어림짐작으로 우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

문득 타임머신 기능 같은 건 없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는 낡은 VCR 플레이어가 세월을 덧씌우며 돌아가고, 내 발아래 러닝머신도 돌아가고, 우주도 돌아가니까. 그리고 모니터링 요원이 아니었다면 보지도 않았을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 안에 피도 돌고 눈물도 도는구나, 느끼게 되니까. ‘바로 그 시간’에 방송을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게 있으니까. TV 속 타임머신은 언제나 이미 방송한 프로그램을 나중에 보는 것이니까, 실시간으로 보는 건 가장 빠른 타임머신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윤이나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않는 일만 하면서도 서른 너머까지 용케 살아남아 있는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현재는 브리즈번의 외국인 노동자. ‘장당 만 원 대신, 시급 16,000원!’을 외치며 남반구까지 왔다. 여기서 번 돈으로 리오넬 메시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가는 것이 목표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놀면 뭐하니?' 효리X비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