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 속 여성 캐릭터 다섯

2019.11.07
KBS ‘동백꽃 필 무렵’은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로맨스와 스릴러, 휴먼 드라마를 넘나드는 이 작품에서 주연만큼이나 빛나는 것은 누구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조연들이다. 특히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결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은 드라마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눈에 띄지는 않아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연기해온 여성 배우들이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주목해야할 여성 캐릭터 다섯을 꼽았다.

손담비의 ‘최향미’
“그런데 사람들은요. 맨날 나보고 가던 길 가래요. 다들 나는 열외라고 생각하나봐. 사람 자꾸 삐뚤어지고 싶게”. 모텔에서 홍자영(염혜란)과 마주친 최향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열외라는 단어야말로 향미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이기 때문이다. ‘까멜리아’의 알바인 그는 손님이 맡겨놓은 비싼 양주를 뚜껑에 따라 몰래 홀짝이거나 술자리에 끼어들어 라이터 따위를 훔치곤 한다. 아무도 향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숨겨왔던 본심을 드러내고,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처음에는 시청자들 눈에도 열외였을 향미는 노규태(오정세)와 강종렬(김지석)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비열한이 됐다가 필사적으로 돈을 모아야만 했던 이유가 서서히 밝혀지면서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된다. 결국 동백(공효진)을 대신해 연쇄살인범 까불이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마지막 말처럼 희생당하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 서사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의뭉스럽고도 처연한 향미의 모습을 표현해낸 것은 어느새 10년차 배우가 된 손담비다. 여성 솔로 가수로서 드물게 성공가도를 걷던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과도 비슷한 디바 역할(MBC ‘빛과 그림자’)이나 주말드라마의 해맑은 부잣집 막내딸 역할(KBS ‘가족끼리 왜 이래)’ 등을 소화하며 점차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연기한 향미는 손담비의 현재를 다시 보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열외가 아니라, 주목해야할 여성 배우 중 한 사람으로서.

고두심의 ‘곽덕순’
곽덕순은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아들 황용식(강하늘)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엄마다. 이 못 말리는 아들이 동백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덕순은 술집을 하는 싱글맘 동백이 곤란에 빠질 때마다 구해주는, 아들 못지않게 정의로운 여자다. 그는 막내아들 용식을 품은 채 남편을 잃었고 억척을 떨며 지금까지 살아남아 상가 번영회장이 됐다. ‘회장님이 제가 살면서 친해본 사람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자 처음 생긴 빽’이라는 동백의 말에 덕순은 기댈 곳 없이 힘들고 외로웠을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식과 동백의 사랑은 그의 딜레마다. 같은 처지의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과 자식을 위하는 모성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덕순은 용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용식에게 “난 딱 그냥 너만 조질겨”라고 선언하고 떠나려는 동백을 붙잡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고두심은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바뀌었을 덕순의 심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덕분에 시청자들은 필구(김강훈)의 친부 강종렬의 존재를 알고 끝내 무너지고 마는 그의 모습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1972년 데뷔해 일찌감치 ‘국민 엄마’ 타이틀을 달았지만, 고두심은 언제나 고두심이었다. 20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영화 ‘가족의 탄생’), 어른이 된 딸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눌 때도(tvN ‘디어 마이 프렌즈’) 그는 자신만의 연기를 했다.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에서 고두심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흔들리기도 하는 덕순이라는 인간을 보여준다. 완벽한 모성의 존재가 아니라.

염혜란의 ‘홍자영’
홍자영은 옹산에서 보기 드문 세련된 여자다. 그리고 아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강자다. 쇼트커트에 슈트차림으로 법정을 누비는 변호사고, 동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자영에게도 약점은 있다. 자꾸만 자신을 쪽팔리게 만드는 남편 노규태다. 이혼 전문 변호사인 자영은 그가 면세점에서 사온 20ml 아이크림만 보고도 불륜을 의심하고 영수증을 뒤져 동백을 상대로 특정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것만으로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자꾸만 열 받는 일들이 생긴다. 도로에서는 남성 운전자에게 “여자가 왜 차는 끌고 나와. 시집이나 쳐가서 남편 밥이나 챙겨주지”라는 폭언을 듣고 ‘변호사 며느리는 자랑하고 싶지만 아들보다 잘난 며느리는 싫은’ 시어머니에게 시달린다. 그가 변호사가 아니라 여성임이 부각되는 순간, 강자인줄만 알았던 자영이 사실은 약자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자영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킨다. 동백에 대한 오해가 풀리자 규태를 성추행으로 고소하겠다는 그를 오히려 돕겠다고 나서고 향미, 규태와 삼자대면 후 ‘오히려 내가 살 길이 보였다’라며 덤덤하게 이혼을 강행한다. 이런 홍자영은 염혜란의 새로운 얼굴이다.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던 그는 tvN ‘도깨비’에서 주인공의 악독한 이모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는 진주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tvN ‘라이브’에서는 실제로 10살 차이도 안 나는 주인공의 엄마로 출연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오롯이 홀로 서는 여성을 연기하는 염혜란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서 더 반갑다.

김선영과 ‘줌마피아’
준기 엄마와 일당들은 언제나 그 골목에 있다. 일명 ‘줌마피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까멜리아가 꽃집이 아니라 술집이고, 동백이 ‘참한 새댁’이 아니라 싱글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사건건 텃세를 부리곤 했다. “너는 요기 1년 365일 앉아 있어 봤냐? 나는 어느 집 된장 뚝배기 이 나간 거까지 다 알어”라는 준기 엄마의 말처럼 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누구에게나 참견하며, 그래서 로맨스만큼이나 스릴러의 비중이 높은 이 드라마에서 ‘줌마피아’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용식이 평상에 둘러앉은 ‘줌마피아’에게 ‘까불이가 누구냐’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느와르처럼 연출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결정적인 단서를 내뱉고도 태연하게 삼겹살에 인삼주를 기울이는 이들은 극의 중심에 있지는 않을지라도 자꾸만 눈이 가는 존재다. 게다가 까불이에게 위협당한 동백이 옹산을 떠나려 할 때 쭈뼛거리며 음식을 잔뜩 담은 박스를 챙겨 나오거나, ‘원래 지 동생 톡톡 건드리는 언니들이 남이 내 동생 건드리는 꼴은 못 보는겨’라며 동백의 뒤를 캐는 기자들을 쫓아내는 이들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줌마피아’의 대장을 연기한 김선영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준기 엄마를 완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가게 자리로 텃세를 부리다 기어코 상대의 머리채를 잡고 마는 단역이었던 그는 tvN ‘응답하라 1988’에서도 ‘줌마피아’ 못지않은 호흡을 선보인 ‘쌍문동 골목 아줌마’ 중 한 사람이었다. 떡집 사장 역의 김미화는 20년 넘게 연극무대에 선 베테랑 배우고, 채소 가게 사장 역의 백현주는 최근 출연작 tvN ‘60일, 지정생존자’와 연극 ‘비평가’에서는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역할을 소화했다. 풍경처럼 존재할 것만 같았던 동네 여자들이 밉상일지언정 하나같이 톡톡 튀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이정은의 ‘조정숙’
‘저 웬수같은 정숙이년. 돈 안 갚은 정숙이년’. 동백의 기억 속에서 조정숙은 모두의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일곱 살 딸을 고아원 앞에 버린 죄만으로도 그는 미움 받아 마땅한 여자다. 그런데 27년 만에 나타난 정숙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아이처럼 웃는다. 당연히 정숙을 대하는 동백의 태도는 냉담하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숙은 뻔뻔하게 동백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나 치매야”라며 당당히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정숙이 사실은 치매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동백을 제외한 모두는 그의 다른 일면들을 보게 된다. 정숙은 결정적인 순간 언제든 동백을 위해 나선다. 필구의 친부 앞에서 머뭇거리는 용식에게 일침을 놓거나 덕순에게 뜬금없이 유세를 떨기도 하고, 까멜리아를 찾아온 제시카(지이수) 모녀를 패대기치면서 그는 줄곧 “동백이 위해서 뭐든 하나는 할 거니까”라고 말한다. 30회에서는 정숙이 그동안 동백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지켜왔고, ‘마지막 하나’가 딸에게 주기 위해 27년간 모아온 자신의 생명보험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정은은 숨겨왔던 정숙의 감정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화산처럼 뜨거운 배우, 이정은은 단역에서 조연, 그리고 주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쳐 자신을 증명해왔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연기만으로 먹고 살 수 없어서 다양한 직업을 가져야만 했고, 카메라 울렁증으로 공백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영화 ‘기생충’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어느새 결정적인 순간을 만드는 배우가 됐다. 과연 이정은이 연기하는 정숙은 동백을 위해 무엇까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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