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진│① 공효진에게 실패는 없다

2019.10.15

“뭘 해도 중박 이상은 간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이 방송되기 몇 주 전, 한 지상파 드라마 PD가 이 작품은 절대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사석에서 한 말이다. 대본이 워낙 좋다는 소문이 자자한 데다 공효진은 MBC ‘대장금’과 붙었을 때(KBS ‘상두야 학교가자’)도 망하지 않은 배우라는 게 근거였다. 이는 업계에서 배우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실제로 공효진 주연의 MBC ‘고맙습니다’, ‘파스타’, ‘최고의 사랑’, SBS ‘주군의 태양’, ‘질투의 화신’, KBS '프로듀사' 등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은 6.85%(1~2회 통합, 닐슨 AGB 전국 기준)로 시작한 시청률이 15~16회에서 12.75%로 뛰었다. 이번에도 공효진은 실패하지 않았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은 공효진이 연기해왔던 여성들의 콜라주다. MBC ‘최고의 사랑’에서 ‘비호감 연예인’이라고 낙인찍힌 ‘구애정’은 KBS ‘동백꽃 필 무렵’에서 고아에 미혼모가 시골에서 술집을 한다며 눈총을 받고, SBS ‘주군의 태양’에서 귀신을 보는 능력 때문에 항상 주눅들어 있던 ‘태공실’은 KBS ‘동백꽃 필 무렵’에서 살면서 칭찬이라고는 두루치기를 맛있게 만든다는 것 외에 들어본 적이 없어 술집을 연다. 요컨대 극중 황용식(강하늘)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딱지 시즌’(“자꾸 쭈그러들고 쭈그러들고 하다가 코딱지만 해질 때”)이 되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한 셈. 여자는 주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리천장을 극복하던 MBC ‘파스타’의 서유경, 놀이기구를 타며 자장면을 먹는 생계형 연예인 구애정, SBS ‘질투의 화신’에서 쇼핑호스트부터 기상캐스터까지 악착같이 계급 사다리를 올라온 표나리로 이어지는 ‘여성 직장인’ 계보는 진상 남자 손님에게 웃어주라는 무례한 요구를 받는 동백이 되어 일하는 여성의 애환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가질 법한 다양한 결핍을 연기하면서 늘 화제성도 놓치지 않는다. 그 힘은 공효진의 절묘한 균형감에서 온다. 90년대 말 ‘쎄씨’나 ‘키키’ 같은 패션 잡지 모델로 연예계 경력을 시작해 그 시절 소녀들의 워너비였던 공효진은 KBS ‘동백꽃 필 무렵’에서 “키 173에 8등신. 원래 나 폼나는 사람이었어”라고 말하는 게 여전히 어울리는 20년째 셀러브리티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패션 아이템을 파는 쇼핑몰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하는 공효진은 당당하기보다 남의 눈치를 살피고 억눌렀던 화를 분출하곤 했다. ‘가족의 탄생’에서 암에 걸린 엄마가 유부남과 연애를 하자 일부러 쏘는 말만 하며 생채기를 내던 선경은 가족과 감정 다툼을 해 본 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자동완성으로 보낸 이모티콘 문자에 수년을 집착하며 한 남자에게 매달리다 “나도 내가 별로인 거 알아!”라고 외치던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아주 극단적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감정을 보여줬다. 공효진의 작품에서 공효진의 캐릭터만큼 중요한 것은 그가 걸려 넘어져야 할 세상천지의 돌부리다. 그들의 존재를 가리지 않고 매번 부딪치지만 공효진 본래의 꼿꼿함을 전제한 캐릭터들은 묘하게 궁상맞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MBC ‘고맙습니다’)부터 두 남자에게 “셋이 살자”라고 하던 기상 캐스터(SBS ‘질투의 화신’)까지, 공효진의 작품에는 이전 드라마에 없던 파격이 있었다. 결핍과 스타성, 현실과 트렌드까지, 이 근사한 밸런스를 타고난 공효진은 데뷔 20년 넘도록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은 톱배우로 남았다.

연기자를 굳이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눈다면, 어떤 역할을 맡든 배우의 개성을 살려 구현해내는 타입과 자신을 지우고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그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공효진은 명백한 전자다. 데뷔 초 SBS ‘화려한 시절’, MBC ‘네 멋대로 해라’ 등에서 확고한 캐릭터성을 보여주며 ‘개성파 여배우’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공효진은 학원에서 배운 것 같지 않은 연기를 구사했다. 영화 ‘가족의 탄생’을 기점으로 공효진은 일상성을 자신만의 리듬으로 구사하는 배우로 진화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의 연기 방식과도 연결된다. 공효진은 대본을 완벽히 암기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연기하는 배우와 거리가 멀다. 대본을 잘 보지 않고 현장에서 자신의 스타일로 대사를 바꾸는 그를 두고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노희경 작가는 ‘공 작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효진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대사들은 공효진 고유의 색으로 발화돼 안착한다. 이것이야말로 공효진만의 현실감과 신선함이 공존할 수 있는 연결고리다.

성별을 통틀어도 독보적인 공효진의 필모그래피에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는데, 아직 그가 연기대상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MBC ‘고맙습니다’, ‘파스타’, ‘최고의 사랑’, SBS ‘괜찮아, 사랑이야’, ‘질투의 화신’ 등이 모두 그에게 ‘최우수 연기상’을 안기는 데 그쳤다. 그런 그가 ‘동백꽃 필 무렵’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 모습을 기다려 본다. 캐릭터가 강한 인물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여성에게 최고의 스포트라이트가 가고, 작품마다 외양을 극적으로 바꾸는 ‘메소드 연기’가 가장 좋은 액팅인 것처럼 추앙받는 분위기를 거스르는 순간이 될 것이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은 원래 “물 밖으로 콧구멍만 내놓고 숨죽이고 살지만 물에서 나와 들이받으면 끝”인 하마로 묘사된다. 지금껏 공효진의 캐릭터가 반전을 꾀하는 신은 늘 극에서 가장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TV 밖에서, 스크린 밖에서도 목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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