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안 보는 시대 │② TV 생존 지침서

2019.10.08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18년도 방송시장 경쟁상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가구 일일 평균 지상파 TV 시청 시간은 2013년 272분, 2015년 248분, 2017년 212분으로 꾸준히 하락세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 OTT를 통한 동영상 콘텐츠 소비가 확산되면서, 앞으로 TV의 침체는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TV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미디어 관계자 및 시청자들의 의견을 취합해 TV를 위한 ‘생존 지침’을 구성해봤다.


시청자를 세분화하고 집중 공략하라
지상파 프로그램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라는 20대 여성 시청자 A는 “케이블이나 종편만큼의 아이디어도 없고, 예전처럼 눈에 확 뜨이는 연출도 없으니 재미있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안전하고 대중적인 콘텐츠만 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시청자뿐 아니라 관계자들도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사의 경우 시청 타깃층이 모호하다고 지적한다. 대중 ‘모두’를 챙기려다 보니 오히려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직 케이블 방송사 PD인 B는 “지상파의 경우 모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새로운 이야기를 선도하는 것이 아닌, ‘남들도 다 하는 이야기’가 됐을 때 뒤따라가는 게 전부가 돼 버렸다”라고 푸념했다.

지상파가 모두가 싫어하지 않을 콘텐츠를 만드는 동안, 케이블과 종편은 방향성이 명확한 콘텐츠를 통해 고정 시청층을 확보했다. 예컨대 MBN ‘나는 자연인이다’는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산에서 홀로 생활하는 이들에 주목, 노후를 앞둔 중장년 남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최근 핑클의 재결합을 이루며 큰 인기를 끈 JTBC ‘캠핑클럽’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향수를 가진 2030세대를 겨냥해 성공한 사례다. 지상파 방송 드라마 평균 시청률이 5% 내외인 지금, KBS1 일일드라마 ‘여름아 부탁해’가 시청률 25%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는 단순히 ‘일일드라마는 원래 시청률이 잘 나와서’가 아니다. 평일 오후 8시 30분에 TV를 보는 이들을 위해 복잡하지 않되 통쾌한 장면을 심어놓는 방식으로 플롯을 전개하고, 신분이나 재력과 상관없이 구질구질하면서도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파가 정치 이념이나 세대에 따라 누군가를 소외시켜야 한다거나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만을 양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편성 요일과 시간, 프로그램의 장르 등을 고려해 시청 타깃층을 명확히 설정하고, 각각 그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TV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뉴미디어의 등장은 일정 부분 올드미디어의 방만에서 비롯됐다. 뉴미디어 ‘닷페이스’는 지난 2017년부터 태국 마사지사들의 열악하고 부당한 처우, 불법 촬영이 만연하게 된 이유, 랜덤채팅을 통한 미성년 성매매, 가정폭력 피해자, 리얼돌 제작 행태,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 등을 조명한 콘텐츠를 제작해왔다. 검경에 출입하는 자사 기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작 인력과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이들은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하고, 취재 과정에서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 국회, 법원, 검찰, 경찰 등에 출입이 가능하고 소위 ‘정보통’이라 부르는 취재원을 확보하고 있는 방송사들은 충분한 환경을 갖췄음에도 닷페이스와 같은 콘텐츠를 내놓지 못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현안을 다루며 사회 구조 전반을 돌아보는 것은 전통적인 시사 프로그램의 역할이기도 하다.

“뉴스나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뉴미디어는 분명 취재에 한계가 있다. 어떤 사건을 제보한다고 했을 때, 구독자가 180만 명이 넘는 유튜버 대도서관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중 어디에 제보를 하겠나.” 유튜브 콘텐츠 제작자 C는 아프리카TV, 트위치, 유튜브 등이 크리에이터 개인의 개성에 의존하는 반면, TV는 인지도와 섭외력을 바탕으로 더 깊고 넓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케이블 방송사 PD인 B 또한 “TV, 특히 지상파 방송국은 시청률이 저조한 지금까지도 영향력과 권위를 갖고 있고, 그에 뒤따르는 섭외 능력도 있다. 섭외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건 곧 게으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평가받는 오늘날에도 TV는 여전히 다른 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TV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무분별한 유행 좇기는 부작용을 불러 온다
‘거기서 거기’인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몰입도와 충성도를 저하시키고 다양성 없이 획일화된 미디어 환경을 조성한다. 20대 남성 시청자 D는 “어느 방송사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프로그램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유튜브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라며 TV 프로그램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최근 TV 프로그램은 공통적으로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며 상황을 연출하고, 스튜디오에 앉은 패널들이 이를 지켜보면서 코멘트를 덧붙이는 ‘관찰’ 형식을 취하고 있다. MBC ‘나 혼자 산다’ 이후 등장한 SBS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과 ‘미운 우리 새끼’, TV조선 ‘아내의 맛’ 등이 대표적인 예다. 20대 여성 시청자 E도 “이제 관찰예능은 지겨운데, 기대했던 김태호 PD의 ‘놀면 뭐하니?’까지도 관찰을 하더라”라며 피로감을 표했다. 이러한 흐름은 육아, 요리, 외국인, 여행, 가상 결혼, 주기적으로 한번씩 돌아오는 짝짓기 프로그램까지 주제만 달라졌을 뿐 이전부터 쭉 이어져왔던 관행이다. 형식뿐 아니라 섭외도 마찬가지다. 장성규가 프리랜서 선언 6개월 만에 7개 고정 프로그램을 맡게 된 건 그만큼 방송사들이 그의 캐릭터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은 새로운 포맷이나 시선을 갖는 대신 이미 웹예능 ‘워크맨’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를 섭외함으로써 수동적으로 ‘선 넘는 장성규’의 일환이 된다.

지금의 TV는 유행을 선도하고 제언하기보다는 이미 거세게 분 열풍의 뒤를 좇는 모습에 가깝다. MBC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성공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준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한국의 연예인들이 해외에 나가는 여행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시기, 발상을 전환해 한국으로 여행을 온 외국인들에 주목했다. ‘영국남자’ 등 유튜브에서는 이미 널리 퍼진 형식이었으나 TV 콘텐츠로서는 이례적인 구성이었다. 그 결과 MBC에브리원 개국 10년 만에 처음으로 시청률 2%를 돌파했고, 2017년 첫 방송 이후 6개월 동안 100억 원 이상의 수익을 냈다. MBC에브리원이라는 채널 자체를 광고하는 효과를 거둔 것은 물론 재방송이 MBC 본사에서 방송되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케이블 방송사 PD F는 이에 대해 “MBC 본사가 낸 적자를 에브리원이 채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효자 대접을 받았다”라고 전했다. 이후 SBS ‘내 방 안내서’, tvN ‘서울메이트’ 등 유사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결과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와 같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유행을 좇는 프로그램과 유행을 만드는 프로그램 중 어떤 것일까. 답은 자명하다.

변화가 필요한 건 시스템 그 자체다
지상파 방송사는 경영난 극복을 위해 중간 광고 도입을 요구한다. 조능희 MBC 기획조정본부장은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지상파 광고 시장도 축소되고 있는 반면 케이블이나 종편은 상향하고 있다”라며 “비대칭 규제가 중간 광고로 연결된다. 공정하게 경쟁하는 광고 시장을 만들어달라는 것은 지상파의 숙원”이라고 주장했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이 이에 대해 지난달 27일 지상파 3사 사장들을 만나 “중간 광고, 편성의 비대칭 규제를 개선해 나가겠다”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은 이미 2017년부터 하나의 프로그램을 2~3부로 나누고, 회당 50분이었던 드라마를 회당 25분으로 나눠 2회 연속 방영하는 등 ‘쪼개기 편성’ 방법을 쓰며 유사 중간광고를 내보내왔다. 방송사의 적자를 광고 탓만으로 돌리긴 어렵다. 예능, 시사, 교양 등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많은 제작비가 필요한 드라마 제작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낮은 시청률로 고전을 겪었던 월화드라마를 일시적으로 폐지했던 SBS는 ‘배가본드’의 막대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 제작비 250억 원 중 일부를 넷플릭스가 부담하는 대신 TV와 동시 방영한다. 540억 원이 투입된 tvN ‘아스달 연대기’ 역시 넷플릭스의 투자가 있었기에 제작이 가능했다. TV는 넷플릭스와 경쟁을 해야 하는 동시에, 넷플릭스의 도움 없이는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투입된 돈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성접대’ 장면으로 논란에 휩싸인 ‘배가본드’와 7%(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로 막을 내린 ‘아스달 연대기’를 생각해보자. 방송사에 필요한 건 더 많은 제작비가 아니라, 어떤 드라마를 제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인건비, 즉 고용 구조에 대한 성찰 역시 필요하다. AD, FD 등 방송스태프 중 많은 이들은 계약직이며 하청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되기도 한다.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드물어, 최대 2년까지 일한 뒤엔 계약 만료로 일터를 떠나야 한다. 지난해엔 방송스태프 노조가 설립되고 하루 20시간 이상의 노동, 폭언이 오가는 제작 환경이 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사는 사내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디어오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5월까지, 방송스태프 노동 처우에 관해 보도한 방송사는 MBC가 2건, KBS, SBS, 채널A, JTBC, MBN, TV조선은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소모되는 계약직 노동자에 더해, 고액 연봉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임금 구조도 문제다. KBS의 공식입장에 따르면 2018년도 연간 급여 대장 기준 연봉 1억 원 이상인 직원은 전체 직원의 51.9%다. KBS가 지상파 방송사 중에서도 고액 연봉자의 비율이 낮다고 알려진 것을 고려하면, 방송사의 인건비 감축 전략은 이러한 기형적인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방송사들이 택한 방법은 신입 채용 인원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중단하고 경력 채용을 늘리는 것이다. 지상파 방송사 PD인 G는 “조연출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고, 공채로 뽑혀 나중에 입봉을 할 수 있는 친구와 파견 또는 계약직이라 계속 조연출로만 일하다 회사를 떠날 친구로 나뉜다. 조연출로 몇 년 구르면 된다는 말은 옛말이 됐다”라고 밝혔다. 그는 언론사 입사를 꿈꾸는 지인이 “선배가 다니는 회사도 계약직 쓰고 버리느냐”라고 물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G는 “소위 ‘높은 사람’들의 무능하고 태만한 모습을 보면 씁쓸하다”라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조직처럼 보인다”라고 회의했다. 케이블 방송사 PD인 B는 “방송은 카메라, 조명, 음향, 미술, 의상, 작가 등 PD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방송이라는 매체가 좋았다. 그러나 정규직 PD를 제외한 모두의 공로는 계약 만료와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방송이 싫다”라고 말했다. 방송사에 필요한 변화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지쳐 떠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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