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김보라 감독 “영화 밖 은희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2019.09.27
“은희야, 너 이제 맞지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영화 ‘벌새’에서 영지(김새벽)는 오빠가 자신을 때리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는 은희(박지후)에게,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당부한다. 이는 김보라 감독이 ‘벌새’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은희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거대한 단절을 마주하도록 한 그는 누구도, 무엇도 ‘나’를 괴롭히게 두지 말라고 말한다. ‘벌새’가 전 세계 유수 영화제 25개상을 수상하고 국내 독립영화로서 이례적인 장기흥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목소리를 기다려왔다는 방증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은희 때로는 영지처럼,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얼굴을 한 김보라 감독을 직접 만나봤다.

하드린다. ‘벌새’가 10만 관객 달성을 앞두고 있다.
김보라
: 일단은 배우분들, 스텝분들,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너무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관객반응이 뜨거운데 그냥 ‘영화가 좋았어요’가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을 얘기해주시는 게 되게 감동적이다. 영화 이상의 체험 같은 느낌을 나도 받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이상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김보라
: GV에서 많이 우는 관객분들, 그리고 나한테 조언을 구하는 분들도 계신다. 나도 조언을 해줄 입장은 아니지만 물어보실 때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건 신뢰한다는 거잖나. 사람으로서. 이 영화보고 친밀감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이 감사하고, 나도 굉장히 친밀한 느낌으로 GV를 했던 것 같다. 대답에 따라 박수도 쳐주시고, 호응도 해주시고. 정말 정말 감사한 날들이다.

GV 전국 각지를 누비고 있다. 수도권 외 지역에서 GV가 활발하게 열리는 일이 흔하진 않은데.
김보라
: 주말에는 포항, 대구, 부산에 갔다 왔다. ‘벌새단’을 비롯해 지방에 계신 분들의 요청이 많이 있었기에 가게 된 건데, 반응이 좋아서 감사했다. 다들 ‘벌새’ 책까지 가지고 오셔서 사인도 받아 가시고, 편지나 선물도 많이 주신다. ‘벌새’ 관련한 팬아트같이 직접 그린 그림도 주신다. 나는 첫 장편인데 이런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돼서 되게 감사한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나, 여성 서사, 여성 캐릭터 등 여성들이 훨씬 더 공감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여성 관객분들이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시는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남성관객분들 중 n차 관람하시는 분들도 많다. GV를 가보면, 1994년 이후 태어난 사람부터 60대까지, 관객 연령층이 다양해서 놀라웠다. 세대를 넘나드는 그런 리뷰를 볼 수 있어 좋았다.

GV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김보라
: 참여하신 분들의 눈빛이 진짜 인상적이다. 강의를 했었기 때문에 듣고 있는 사람이 집중을 하고 있을 때는 딱 바로 아는데, 막 적으면서 듣는 분들도 계시고. GV의 분위기가 정말 집중된 그 느낌, 엄청나게 따뜻한 환대의 느낌이 든다. ‘이게 우리 영화야’라는 느낌을 갖고 계신 것 같다. 그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남이다. 나를 정말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시면서 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나도 안다. 나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 영화들이 있었으니까. 편지들을 봤을 때, ‘묻어가려 했던 기억들을 꺼내서 보여주셔서 너무나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말들이 많았다. ‘벌새’를 볼 때는 여성을 피해자로 그린다거나, 강간이나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없어서 너무 좋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간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괴롭고 불편했었는지를 알게 됐다는 말씀에, 마음이 아팠고 더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어떤 책임감도 생겼던 것 같다. 나도 가끔 상업영화를 보긴 하지만 불편한 마음들과 함께 본다. 그런 불편한 점들을 제외하고 좋아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벌새’를 좋아해주신다는 게 더 뜻깊은 것 같다.

김보라 감독을 ‘영지 선생님’ 같은 존재로 보는 시선도 있다.
김보라
: 부담도 많이 되는 게, 내가 당연히 막 엄청 그렇게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너무 멋진 사람으로 봐주시니까 감사하긴 한데, 그냥 다양하게 봐주시면 좋겠다. 사실 엄청나게 찌질하고 바보 같은 면이 많다. 뭔가 민망하다(웃음).

영화를 만들며 “여성으로서 더 일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고 했다. 해외 유수의 영화제 수상, 관객 반응 등 개봉 이후 중간 성적표를 받아든 지금은 어떤가.
김보
: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그런 기대치가 더 높아질 수도 있고, 더 여유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래도 잘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계속 갈 것 같다. 만듦새에 대한 욕망이 많이 있다. 편집이나 연출, 연기, 미장센, 음악 등이 딱 떨어졌을 때의 희열이 엄청나다. 어쨌든 창작자로서, 장인들이 어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막 노력하는 그 자세는 계속 가져가고 싶다. 다만, 옛날과 다른 점은, 스스로 너무 몰아가거나, 의심하거나, 돌다리를 너무 두드려본다든가(웃음) 그런 건 좀 안 하고 싶다.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면서도 장인정신을 발휘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SNS를 비롯한 여러 반응을 다양하게 살피는 것 같은데, 그러면 스스로가 힘들어지진 않나.
김보라
: 개봉한 영화감독님들은 안 본다고 해도 다들 보시는 것 같다(웃음). 자기가 내놓은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닐까. 지금은 너무 양이 많아져서 다는 못 읽지만, 조금씩 체크하려고 한다. 신기하게도 내가 악플이나 이런 것들에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더라. 악플들을 보면, 이 사람은 그냥 화가 나있는데, 그 화를 이 영화에다가 투사하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벌새’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는다. 비판 같은 경우, 취할 건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것에는 너무나 큰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창작자들은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에 귀가 열리지 않나. 하지만 비판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독설보다는 애정 어린 비판을 하는 글들에 동의한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어, 이건 좀’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관객분들, 특히 여성 관객분들이 보여주는 ‘벌새’를 향한 사랑의 에너지들이 완충재가 된다.

많은 여성 관객들이 ‘벌새단’이 되어 직접 영화를 홍보하고 있다.
김보라
: 벌새단 단톡방(단체 카카오톡 채팅방)도 있다(웃음). SNS를 찾아봐도 ‘벌새’가 자신의 영화라고 생각하신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그냥 ‘벌새 재밌다더라’가 아니라, ‘이건 내 영화니까 내가 영업을 할 거야’라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정말 고마웠다. 영화에 대한 해석들을 봤는데 너무나 예리하고 날카롭고 좋더라.

의도치 않았던 장면들을 관객들이 확장시켜준 경우도 있었나.
김보라
: 예를 들어, 영지가 노래를 마치고 살짝 웃으면 선인장이 인서트로 딱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선인장이 ‘손가락 선인장’이었던 거다. 그건 그냥 한문학원에 놓인 두 개의 식물 중 하나를 찍은 거였다. 기분 좋은 우연인데, ‘감독님이 이런 것까지 다 의도하셨다’라고 읽어주시더라. 재밌었다. 영화가 운명이 있지 않나. 그런 운명에 따라 우연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영지 선생님과 은희가 병원에서 입원하기 전에 포옹하는 장면이 있는데, 안는 순간 바람이 스윽 불었다. 정서가 중요한 장면들을 찍을 때 꼭 바람이 그렇게 알아서 불어주더라. 옥상에서 은희랑 지숙이 얘기하는 장면의 끝에서도 바람이 또 스윽 불고. 현장에서도 정말 신기했다.

관객들이 열렬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건 ‘벌새’가 서울 대치동을 배경의 한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보편적으로도 받아들여지기 때문인 거 같다.
김보라
: 부모님이 싸운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을 때 같은 장면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늘 있는 얘기다. 엄마아빠가 싸우고 나면 엄마가 집을 나갈 때 항상 사용하는 캐리어가 집에 항상 대기 상태로 있었다든가 하는 얘기들 말이다. 친구들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다른 집들도 내 집이랑 되게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그런 지점에서 1990년대의 ‘정상 가족’인 은희네 집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어디 뉴스에 나오는 가족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들이 ‘정상’으로 대해지던 시대의 일반적인 가정. 다만 그런 부분들은 나중에 상처로 남기에 희화화 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경험하고 친구들에게 들었던 그런 보편적인 것들을 낯선 방식으로 녹여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보편성을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든 은희’의 이야기라는 걸 실감했던 장면도 있나.
김보라: 은희가 나는 성격이 나쁜 게 아니고,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는 장면. 몰랐던 사실이라기보다는, 큰 공감이 형성되는 걸 보면서 정말 보편의 경험이구나 싶었다. 여자들은 뭐 하나 제대로 말을 해도 ‘드세다’, ‘기가 세다’, ‘별나다’ 이런 얘기들을 듣지 않나. 우리가 얼마나 억압받으며 살아왔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우리가 처해있는 어떤 상황이나 사회에 묵혀놨던 감정들이 올라오는 경험이었다. ‘벌새’에 대한 폭발적 반응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되게 많은 것을 참아왔고 감내해왔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한다.

새서울의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고막이 찢어진 은희에게 진단서가 필요하냐고 물을 때, 유독 한국관객들이 크게 웃었다고 들었다.
김보라
: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긴 하다. 의사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따뜻함이 훅 들어와서, 마음이 놓여서 웃었다는 반응도 있었다. 은희가 그래도 이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에.

진단서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병원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올 때마다 긴장되더라. 도시개발, 소파 밑에 놓인 유리조각, 매일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대치동에서 버틸 수 있는 은희네 형편 등 영화 전반에 깔린, 언제든 버려지거나 내몰릴 것 같은 불안감도 ‘정상성’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까.
김보라
: 그게 한국사회에서의 삶인 것 같다. 경쟁하고, 계속해서 달려야 하고, 본질이 아닌 것들을 쫓다보니 불안하고 도태되는 것, 또는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이 있다.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모서리에 선 것 같은 예민한 작업인지라, 나도 ‘벌새’를 만들며 불안 같은 것들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뭔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어떤 허상, 공동의 환상과 환영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불안하다는 결론이었다. 불안하기 때문에 서로를 돌보거나 곁을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없고. ‘인싸(인사이더)’, ‘아싸(아웃사이더)’라는 단어가 지금의 우리사회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인싸’가 되려는 욕망을 많이 들여다본다. 이 욕망이 어디서 왔을까. 진짜 내 욕망은 맞나. 그런 욕망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나 자신이 본질과 멀어진다. 그래서 최대한 집단에 있더라도 단독자로서의 나를 지키려고 한다. 함께 어우러져 살지만 동시에 스스로 ‘단독자’인 삶을 꿈꾼다. 친구, 가족, 애인이 있고 그들과 나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항상 내가 단독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영지나 은희는 ‘단독자’로 그리고 싶었다. 이 사회에서 홀로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독자로서의 삶.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지만 ‘인싸’가 되려는 욕망은 없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라는 책을 영지의 책상에 놓기도 했고.

관객들은 3년 뒤 IMF가 불어 닥칠 것을 알고 있다. 은희네 가족의 미래가 평탄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보라
: 그런 느낌, 정말 서늘하고 따뜻하고 아주 뾰족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현실적인데 낯선. 딱 빛과 어둠이 같이 있고, ‘uncanny’라는 영어 단어가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의도를 세우고 그에 따른 모든 선택-촬영, 스토리보드, 편집, 음악-들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선택에 있어서 정해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추상적인 감정들을 영상화하면서 사람들이 이해를 할까 싶었던 장면들을 다들 되게 좋아해주셔서 좀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오프닝이나 밖에서 엄마를 부르는 장면도 그렇고, 추상적인 감정을 시각화하는 데에 대한 확신 같은 걸 느끼게 됐다.

오프닝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버려질까봐 불안하지만 동시에 사랑받기 위해 그 마음을 드러내고 싶진 않은’ 감정을 그려낸 것 같았다.
김보라
: 정확히 봤다. 은희는 902호에서 일어났던 난동에 대해서 엄마에게 싹 표정을 감춘다. 그런 게 이 아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은희와 엄마 사이의 심연을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이 캐릭터가 어디에 어떤 상태인지 드러내줘야 하지 않나. 영화가 오프닝에서 가장 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엔딩에서 어떻게 수확하느냐의 구조라고 한다면, 그에 충실해서 이 아이가 최대한 어떤 불안한 순간에서 시작하고, 한껏 편안해진 얼굴로 희망을 남겨준 채 끝내는 그런 구조를 만들고자했다. 힘 좀 줬다(웃음).

은희와 엄마 사이의 심연은 은희가 엄마를 집 밖에서 만났을 때도 드러난다. 엄마는 꼭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처럼 보였다.
김보라
: 삶의 허무함, 설명할 수 있는 감정들이 있지 않나. 기분이 되게 좋다가도 이상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들어가는 쓸쓸함이 있을 때가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는 자신 안의 소용들이, 그 고독의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가 초인적으로 노동을 하면서 돌보지 못했던 자기와의 만남인 거다. 꼭 나쁜 감정들만은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감정들을 다독이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된 영화답게, ‘벌새’의 영어 제목은 ‘House of Hummingbird(벌새의 집)’다. 은희는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 비로소 거실에 나와 120일 기념 테이프를 녹음하기도 하고,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추기도 한다.
김보라
: 아이가 그 집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은희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다. 오롯한 자기만의 방이 없기도 하고. 사람들이 없을 때에만 은희에게 그 집이 오롯이 자기의 공간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은희와 같은 방을 쓰는 수희는 계속해서 집 밖으로 나가고 밤중에 애인과 함께 들어온다.
김보라
: 이유는 자명하다. 각각 자신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누군가는 남자 애인에게 기댈 거고, 누군가는 만화에 기댈 거고, 누군가는 운동에 기댈 거다. 수희는 그렇게 밖으로 놀러 다니고 남자 애인에게 기대는 방식을 택했던 거다. 은희는 다행히 영지를 만났지만 모두가 영지 같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수희는 그래도 ‘따뜻하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남자 애인이 있는’ 아이로 그려서 관객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수희 같은 경우 아버지의 폭압적인 것들을 가장 먼저 직격탄으로 맞은 장녀로서 스트레스도 받았을 거고, 그런 말들이 가져오는 결과들로 인해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은희 뿐 아니라 수희, 대훈이 모두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피해를 입는 부분들이 조금씩 있다. 대훈도 서울대에 가야한다는 압박을 받고, “아빠 앞에서” 은희를 때렸다고 혼이 난다. 아빠는 때렸다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 앞에서’ 때렸다는 것을 기분 나빠 하는데, 가정에서의 권력 관계를 보여주려 했다.

집안 내 최고 권력자처럼 보이는 아빠는 왜 자꾸 아이들을 혼냈을까.
김보라
: 그 캐릭터 자체가 가진 불안함과 열등감이 있다. 대치동이라는 동네의 ‘2등 시민’ 같은. 지방 출신이 서울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열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뒤틀린 욕망들을 가족과 밥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사갔던 손님에 대해 거칠게 욕하는 장면에서 드러냈다. 그런 사람은 자기보다 힘없는 약자들을 제대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분노를 투사했을 거다. 분명 가부장제에서 억압을 하는 사람들은 강해서가 아니라, 연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강한 사람은 타인을 억압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빠와 오빠가 자기연민에 젖어 눈물을 터뜨릴 때, 카메라가 적정한 거리를 두는 이유와 같은 맥락인가.
김보라
: ‘이런 나쁜 놈들’ 이런 게 아니라, 그들을 관찰하려는 마음이었다. 감정적으로 극대화할 필요 없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고, 그래서 아빠와 오빠가 권력자이고 가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굉장히 억압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빠가 고춧가루를 가지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이미 그가 가진 열등감과 권력 없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은희에게 폭력을 가하는 오빠가 사실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내가 작가로서 그 두 캐릭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려고 한 것도 있다. 누구나 자기연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연약한 면이 있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 캐릭터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다채롭게 그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직접적인 폭력 장면이 없었기에 더욱 아빠와 대훈이 단순한 가해자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김보라
: 반복되는 폭력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조차 재생산하고 싶지 않았다. 폭력이란 건 보여주지 않고 상상하게 할 때 더 아플 때도 있다. 폭력이나 강간 장면이 많이 묘사되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그런 재생산되는 이미지는 굉장히 게으른, 성찰 없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많이 본 앵글과 방식으로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가. 적어도 내 영화에서만큼은 최대한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서 더 아픈 감정들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함부로 동정하지 말자”라는 영지의 말과 같은 맥락에 놓인 것 같다. 은희를 피해자의 자리에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보였다.
김보라
: 내가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나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함부로 누군가를 동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누구도 동정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삶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들만의 정원이 있다. 누군가 불쌍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어느 누구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그런 것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영지가 운동권으로 그려지는 것도 흥미롭다. 운동의 주체로서의 여성도 기존 영화에서는 많이 볼 수 없었던 낯선 풍경이다.
김보라
: 내 주변 여자들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들과 항상 연관돼 있었다. 시민단체, 사회운동 등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다. 영지 같은 느낌을 주는 친구들이 많이 있기도 했고, 영지의 느슨한 모델이 됐던, 내가 어릴 때 한문학원에서 만난 선생님도 그런 얼굴을 하고 계셨다. 그런 게 익숙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다. 나도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사회적인 이슈 같은 것들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여성이라서 정치적인 부분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약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은희가 영지의 집에 찾아갔을 때, 영지의 사진에서 보이는 표정은 선생님이 아닌 누군가의 딸이나 친구로서의 영지가 보였다.
김보라
: 평범한 느낌으로도 보이길 바랐다. 아무런 연고 없이 집도 절도 없이 혼자 살고 있고 이런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집도 있고 엄마도 있네, 이런 느낌. 관객들이 그런 느낌을 받길 바랐고 그게 오히려 전형적이지 않다고 봤다.

선생님이 아닐 때의 영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김보라
: 은희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비슷했을 것 같다.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을 거고, 좀 선비 같은 사람. 주변사람들하고 잘 지내지만 ‘인싸’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고. 사회의 아픔에 많이 예민했을 거라고 상상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본질적인 질문들을 좀 일찍 시작하고, 또 그것 때문에 많이 아파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든 좀 공정하게 살기 위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삶을 성찰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노력하려고 하는 사람. 좋은 걸 다 갖다 붙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은 또 아니라서 고통 속에 있는 표정이 언뜻언뜻 드러나길 바랐다. 캐릭터를 구축할 때 김새벽 배우와도 ‘자기 역시 힘듦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아는 만큼을 나눠주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은희가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단짝 친구인 지숙에게도 하지 않았던 건 독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김보라
: 진짜로 소중한 건 오히려 시시콜콜 얘기를 못하게 되지 않나. 그래서 아껴둘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 줄 떡을 지숙에게 줄 거라고 둘러대는 것처럼, 902호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하지 않은 것처럼, 진짜 중요한 감정들은 얘기할 수 없다. 정말로 좋아하는 선생님이 생겼지만, 소중한 것을 너무 쉽게 발설하지 않으려는 아이의 마음이다. 지숙이는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돌파구를 잘 찾아갔을 것 같다. 어떻게 됐든 각자 자기만의 생존의 방식을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지숙이가 어디론가 버려질 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태도로 돌파해나가며 자기만의 삶을 살길 바랐다.

영지는 은희에게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데, 그가 앞서 부른 노래의 제목은 ‘잘린 손가락’이다.
김보라
: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손가락이 잘렸다고 해서 ‘손가락이 잘렸는데 뭐 어쩌라고’가 아니라, 당장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뭔가를 해보는 것 말이다. 은희가 대훈에게 소리를 질렀다가 뺨을 맞고 고막이 찢어지는 장면에서도, 일단 아이가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항을 했고 고막이 찢어졌지만,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가 계속 걸어가고 나아가는 것,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은희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경험하고, ‘벌새’는 이 과정을 연결과 단절,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보여준다. 은희가 절망하는 장면 이후에는 영지를 만나 위로를 얻고 긴장감이 높은 상황 뒤에는 다소 느슨한 상황이 이어진다. 이런 구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김보라
: 삶에서 일견 나빠 보이는 것들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삶의 마법 같은 일들이 있지 않나. 되게 안 좋은 일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걸로 인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든가. 그런 삶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벌새’를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라고 하는데, 내 기준에서는 엄청나게 다이내믹하다. 잔잔하지만 강한 추동력을 가진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극적이라고 하는 게 뭘 때려 부수거나 엄청난 소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한 리듬과 약한 리듬,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왔다 갔다 하게 하면서 잔잔한데 계속 역동적인 구조를 짰다. 사실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이후 엄마는 찢어진 스타킹을 신은 채 자고 있는데, 은희는 다음날 락카페를 가지 않나. 그런 리듬의 변화들을 시나리오나 편집 단계에서 계속 주려고 노력했다.

1994년 성수대교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도 이런 구조의 맥락인가.
김보라
: 처음부터 결정했던 부분이다. 성수대교 사건은 개인적으로 꼭 다루고 싶었다. 다리가 붕괴됐다는 단절의 이미지가 은희가 여정 속에서 겪는 크고 작은 경험들과 연관된다. 88올림픽 이후 우리사회가 서구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열망에 취해 으쓱해졌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1988년은 대학원 졸업 작품인 ‘리코더 시험’의 배경이기도 하다. 성수대교 사건은 더 빨리 개발하고 달려야 했던 우리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데에 아주 가시적인 계기가 됐다. 그런 이미지가 은희의 이야기와 굉장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1994년이어야만 했다.

은희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한참동안 바라본 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는 운동장에 서서 주변 아이들을 가만히 둘러본다. 타인으로 시선을 확장한 은희가 화면의 중심에 서는 모습이 ‘모든 은희들’과 함께 하겠다는 감독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보라
: 끝맺음에 또 다른 시작이 함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우수에 찬 엔딩의 느낌을 주면서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음악이 함께 했다. 영화를 만들 때 항상 ‘삶은 계속된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은희가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한껏 성장한 모습으로, 영화 밖으로 걸어가서 계속 ‘잘’ 살 거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언제나 삶과 같이 있는 죽음은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죽음이 있으면 또 다른 탄생이 있다. 그래서 영지의 죽음을 나쁘게만 그리고 싶진 않았다. 영지의 메시지는 은희의 마음 안에 살아 숨 쉴 거라고 생각한다. 은희가 앞으로의 세상에서 스스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벌새’를 만난 관객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나.
김보라
: 은희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위로 받으면 좋겠다. 어떤 실질적인 해결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도 큰 치유와 해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경험들을 들여다보고 만나는 장이 됐으면 한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 처리되지 못했던 감정들과 만나면서 또 다른 서사가 생기길 바란다.

‘리코더 시험’에서 초등학생, ‘벌새’에서 중학생 은희를 그렸지만 앞으로 또 다른 은희의 이야기는 만들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개봉 이후의 경험을 통틀어 ‘벌새’는 당신에게 어떤 작품이라고 정리하고 싶은가.
김보라
: 지금으로선 나와 우리 모두의 집단상담 영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웃음). ‘벌새’는 내 삶을 성찰하게 만들어 준 영화다.

‘벌새’를 준비 중이었을 때 여성감독의 롤모델이 부재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 점에서 김보라 감독의 상업영화를 고대하는 이들이 많다.
김보라
: 일단은 ‘벌새’ 개봉 관련해서 할일이 많아서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또 창작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담이 되진 않는다. 확실히 책임감은 든다. 예를 들면, 관객분들이 은희가 새서울의원에서 의사 선생님과 단둘이 있을 때 은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너무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셔서 정말 충격적이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플롯으로 관객분들이 그렇게 불안해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영화는 대체 여태까지 뭘 어떻게 보여줬던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더라.

상업영화는 ‘벌새’에서 최대한 배제했던 폭력의 전시나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상업영화로 진출한다면 고민되는 부분이 많을 것 같다.
김보라
: 상업영화를 만든다면, 나도 투자사들의 압박이나 내 시나리오가 부당한 압력에 침해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시스템을 찾아나가고 있는 중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작품들이 몇 개 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렇게까지 하면서 상업영화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영화가 아니라 사업을 했을 거고 대성했을 거다(웃음).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인데, 영혼을 파는 작품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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