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코믹스 읽는 여자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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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코믹스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바야흐로 극장에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를 보고 나왔던 2014년. 영화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화 정보를 검색해 읽던 중에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원작의 존재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순전히 호기심으로 집어보았던 코믹스였는데, 가히 비주얼쇼크였다. 당장이라도 책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불끈거리는 신체 묘사, 그래픽노블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빼곡하게 들어찬 대사량, 그리고 황당하리만큼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웅들의 불굴의 의지력은 그날 그 순간 나의 바이오리듬을 뒤흔들어놓았다. 이제 나의 일주일은 코믹스가 발매되는 수요일을 기점으로 코믹스를 읽는 날과 읽지 않는 날, 둘로 나뉜다. 코믹스 읽는 여자. 이 딱지표 덕분에 여러 웃지 못할 일들을 겪었다.

왜 남자들은 여자가 마블을 좋아한다고 하면 곧장 자기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고 아는 척을 하는 걸까? 여성 팬들 사이에선 보이지 않는 기현상이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아는 티를 내면 그들은 무안해하기보다 도리어 지식 경합을 걸어오곤 한다. “하지만 이것까진 알지 못할걸?” 심지어 내가 이미 본문에 다 적어놓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도 있다. 차라리 그렇게 맨스플레인만 하면 다행이다. 경합에서 패배한 자들은 어째선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인신공격을 하기도 한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높은 확률로 성희롱성 모욕이 뒤따른다. 그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길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현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여성 창작자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한치의 '정치적 올바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안티 페미니스트 팬덤 '코믹스게이트'가 상상 이상의 규모로 버젓이 활동하는 실정이다. 마블코믹스는 생각보다 최신 트렌드를 발 빠르게 흡수하고 저작에 적용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팬덤이 서평과 구매력을 시끄럽게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코멘트 한 개, 나의 구매 하나에 연재의 흥망성쇠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1세기 문명 사회에 발매되는 책이 되도록 소수자성을 포용하고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적폐라면, 나는 적폐다. 내가 굳이 싸움을 찾아다니는 키보드워리어가 된 까닭이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동시에 코믹스를 좋아한다는 건 결코 평탄하지 않다.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약하거나’ 혹은 ‘야하거나’ 둘로 이분되었다. 과거에는 강인한 여성영웅조차 이런 한계에 발 묶이기 일쑤였다. 비주얼적인 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체 구조를 기형적으로 비틀어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을 강조해 그려내는 이른바 ‘엉슴포즈’ 따위의 그림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혹자들이 코믹스를 성적대상화로 점철된 저급한 서브컬쳐라고 치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떻게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코믹스라는 매체를 즐기는 것이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는 된다. 나 역시 코믹스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소위 '고전 명작'을 읽을 때 이런 몰이해로 인한 여성 묘사를 심심찮게 발견하고 실망하곤 하니까.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금 이순간 코믹스를 이끌어나가는 여성 캐릭터와 여성 창작자의 목소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코믹스는 모두를 위한 것이며, 코믹스의 문이 해마다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보람을 느낀다.

한번은 그런 코멘트를 받은 적이 있다. “코믹스를 읽는 사람의 99.9퍼센트가 남성인데, 코믹스가 여성을 위해야 된다는 것은 부당하다.” 당연히 남성 팬에게서 들은 말이다. 2017년 코믹스를 읽는 현지인들 7만2천 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체 구매자들 중 남성은 63퍼센트, 여성은 37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무려 4할이나 되는 여성 독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판 무시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리뷰를 쓴다. 코믹스 읽는 여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만 이 좋은 것을 읽을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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