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폭스, 마블 코믹스의 한국인 슈퍼히어로

2019.09.06
©Marvel
최근 해외 인터넷 커뮤니티에 ‘동양인 자녀들 공감 영상’이라는 게시글이 큰 반응을 얻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무언가에 쫓기듯이 허겁지겁 쌀을 씻고 손등으로 물을 잰 다음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른다. 그 순간 외출하셨던 어머니가 귀가하고, 주인공이 공포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영상은 끝난다. 어머니가 오셨는데 집에 밥이 없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빵 아닌 쌀밥을 주식으로 먹는 동양인 가정에서만 통하는 내부 농담(inside joke)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 독자가 미국에서 출판되어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미국 만화를 읽으면서 이와 같은 내부 농담에 웃고 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이를테면 '삼촌'들이 밥값을 자기가 계산하기 위해 영수증을 놓고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이다가, 한국식 룸 형태의 노래방에 가서 뒷풀이를 한다면 어떠한가. 공중파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다. 마블코믹스 속 한국인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다.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마블코믹스 속 동양과 동양인의 묘사는 스테레오타입에 그칠 뿐이었다. 그들에게 동양은 한중일을 비롯한 수개국을 대충 하나로 뭉친 어떤 가상의 공간이었다. 동양인 캐릭터는 백인 캐릭터의 하인이나 신하로 등장해 이등시민임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닌자와 사무라이, 쿵푸, 그리고 명상과 기(chi) 치료는 단순히 이국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골 소재로써 국적에 관계 없이 빈번하게 오남용되었다. 그들은 동양인을 백인 주인공과는 다른 타인이라는 구석진 자리에 세워놓고 열등한 존재, 중요하지 않은 존재, 잘 몰라도 되는 존재로 그려냈다.

동양인 타자화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았다. 대표적인 한국인 슈퍼히어로 화이트폭스는 마블코믹스가 해외진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다음 콜라보 웹툰 ‘어벤져스: 일렉트릭 레인(2014)’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한국에 마지막 남은 구미호인 그는 낮에는 국정원 요원으로서, 밤에는 슈퍼히어로로서 어벤저스와 협력하며 갖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한국을 지켜낸다. 2015년에 화이트폭스가 공식 세계관에 편입된 이후로 드물지만 꾸준하게 주역 단편 작품이 나오고 있는데, 그 묘사가 문화적으로 섬세한 고증을 거쳤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다. ‘시빌 워II: 양자택일(2016)’에서 화이트폭스는 홍대 카페를 찾은 캡틴 마블에게 미국인의 미래 예지 능력을 통한 치안 강화를 제안받는다. 이때 그는 한국전쟁의 역사를 들면서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마블코믹스프레젠트(2019)’에서는 상처 입은 기를 치료하기 위해 여우구슬을 찾으러 교토로 떠난다. 구미호의 영물이 일본에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수탈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화이트폭스는 뭉뚱그린 ‘동양 어딘가’가 아니라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된다.

성황리에 연재 중인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2019)’는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히어로만으로 구성된 팀이라는 점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팀 구성원의 절반 가량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헐크의 능력을 지닌 천재소년 아마데우스 조, 피터 파커와 같은 방사능 거미에 물린 신디 문. 이민가정 2세대 한국계 미국인 히어로인 두 사람은 단독 주인공 시리즈도 갖고 있는 마블의 주요 캐릭터들이다. K-POP 스타이자 얼음 능력자인 루나 스노우(설희), 반달가슴곰 수호자 이오와 유대를 맺은 태권도소녀 크레센트(단비), 이 둘은 모바일게임 ‘마블 퓨처 파이트’에서 디자인한 오리지널 캐릭터로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슈퍼히어로다. 이들이 큰 전투를 앞두고 쌀밥과 스팸구이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는 장면을 읽노라면, 그리고 화이트폭스가 “눈코 뜰 새 없다”라는 한국적인 표현을 쓰는 장면을 읽노라면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만 존재했던 마블 유니버스는 돌연 한국인 독자가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현실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어렴풋했던 동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해당 스펙트럼에 속하는 독자를 순식간에 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작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세계 어딘가에 ‘내가 있어도 될 것 같은’ 소속감마저도 들 정도다.

문화적 다양성을 나타내는 작품에는 폭넓은 독자층을 포용하는 힘이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장르가 세분화되긴 했지만 본디 만화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아이들이 우러러보는 만화 속 영웅들이 인종적으로 자신과 닮아있는 점을 발견한다면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는 훨씬 클 것이다. 마블의 영웅이 서울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화이트폭스와 ‘에이전트 오브 아틀라스’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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