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반전│② 호텔 델루나, 비디오스타, 남자친구

2019.08.27
최근 방영 중인 tvN ‘삼시세끼 산촌편’은 방영 전 ‘삼시세끼 여자편’으로 알려졌다. 같은 포맷에서 여성이 출연한다는 이유가 곧 프로그램의 변화처럼 여겨지는 것은 지금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설정이나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나 영화, 또는 같은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성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큼, 상업적인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여성 출연자가 주목받는 작품은 흔치 않다. 하지만 ‘삼시세끼 산촌편’을 비롯, 근래 어느 때보다 여성에게 다른 역할을 주는 작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들은 성별을 바꾸는 것으로 어떤 시도와 결과를 보여줬을까. 올해 안에 TV에서 방영하거나 상영된 영화 중 여섯 작품을 골라 이들 작품이 성별반전을 활용하는 방식을 들여다 보았다.

‘주군의 태양’과 ‘호텔 델루나’

홍정은, 홍미란 작가의 tvN ‘호텔 델루나’는 그들이 집필했던 SBS ‘주군의 태양’의 캐릭터를 스스로 성별반전 시킨 것처럼 보인다. ‘주군의 태양’에서 귀신을 보는 능력을 가진 태공실(공효진)은 백화점 사장 주중원(소지섭) 옆에 있으면 귀신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그의 옆에 있으려 한다. ‘호텔 델루나’에서는 천 년 동안 죽지 못한 채 죽은이들을 위한 호텔, 델루나를 경영하는 사장 장만월(이지은)이 지배인으로 점찍은 구찬성(여진구)에게 귀신을 보는 능력을 부여한다. 구찬성은 장만월에게 이 능력을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주중원과 장만월은 둘 다 괴팍하다고 할 만큼 독특한 성격을 가졌고, 두 사람은 상대역과 함께 귀신이 얽힌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다. 같은 작가가 비슷한 설정과 전개를 가진 작품에서 성별만 바꾸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정말 크다.

장만월은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저주가 담긴 총을 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무수히 많이 보여준 모습이다. 하지만 여자 배우, 그것도 20대 중반의 여자 배우에게는 전례를 찾기 어렵다고 할 만큼 특별한 캐릭터가 된다. 장만월이 권력을 가진 여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가 델루나 호텔의 직원들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것은 직원들을 저승으로 보낼 권한이 있어서다. 구찬성이 델루나 호텔의 지배인이 된 것도 장만월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그의 아버지와 맺은 계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만월은 이 작품에서 ‘악녀’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시청자에게 이해받아야 하고, 실제로 이해받고 있는 주인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여자 주인공인 그의 몫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화내고 싶을 때 화내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드라마에서 여남 차이처럼 묘사되던 많은 설정들은 ‘호텔 델루나’를 통해 성별 간 권력과 사회적인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 장만월이 구찬성의 말에 잠깐씩 마음이 흔들릴 때, 그는 구찬성에게 지금의 마음을 그대로 말하며 그래서 화가 난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은 거의 모두 남자 주인공의 몫이었다. 하지만 장만월은 구찬성의 고용인이자 압도적인 권력을 가졌으며, 천년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살면서 여남에 대한 고정관념도 없다. 그 결과 장만월은 한국 드라마에서 못 봤던 것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쾌감을 준다.

그러나 ‘호텔 델루나’는 아직 바뀌지 않는 것들도 보여준다. 장만월은 자신의 능력으로 번 돈을 비싼 자가용이나 와인, 옷 등을 사는 데 쓴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여성의 소비생활에 대해 ‘사치’나 ‘된장녀’ 같은 비하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사회에서 번 돈을 쓰고 싶은 데 쓰는 여자 주인공은 오히려 긍정적인데다 신선하다. 하지만 ‘호텔 델루나’에서 장만월의 소비는 장만월의 별난 성격을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다. 그가 타인에게 외로움과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위악적인 언행을 하는 것처럼, 그의 소비는 주변 사람들이 편견을 갖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장만월이 비싼 물건들을 탐내는 것은 코믹한 분위기로 그려지고, 구찬성은 그가 새 차를 한 대 더 사자 차가 그렇게 많은데 또 샀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구찬성의 상사가 tvN ‘도깨비’의 김신(공유)이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시선이다. 김신은 집안을 비싼 물건들로 꾸며놓는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소비생활에 선입견이나 판정을 하지 않는다. 그가 천여 년을 산 도깨비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당연한 일로 여기고, 그에 대해 몰랐던 지은탁(김고은)은 부러워할 뿐이다. 반면 김신과 비슷한 세월을 초현실적인 존재로 살아온 장만월의 소비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나거나, 부정적으로 보일 이유가 된다. 심지어 구찬성은 계약의 대가로 어린 시절부터 장만월에게 학비를 지원 받았다. 그가 장만월에게 호텔에 일한 직후부터 ‘사장님’이 아닌 ‘당신'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호텔 델루나’는 여자 주인공이 지금까지 남자가 많이 해오던 역할을 하면서 새로움을 주지만, 기존의 많은 드라마가 보여준 여성에 대한 시선을 다 벗어나지는 못했다. 성별을 바꾸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하는 작가들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호텔 델루나’의 다음 작품들은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라디오스타’와 ‘비디오스타’

MBC ‘라디오스타’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황금어장’ 속 작은 코너였던 ‘라디오스타’는 MC들이 불법 행위, 막말 등 각종 논란에 휘말리며 하차를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윤종신이나 막내 MC가 주제를 던지고, 김구라가 돌아오는 대답에 허점을 파고들며 공격하면, 김국진이 상황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게스트들이 두려워한다는 ‘독한’ 질문은 주로 김구라의 입을 통해 나온다. ‘호사가’라는 캐릭터를 내세우는 그는 대뜸 게스트의 자산이나 주변 인맥, 증권가에 떠도는 루머 등을 언급한다. 인종차별을 말하는 한현민을 향해 “나이지리아의 수도가 어딘지 아느냐” 묻고, 아이돌 멤버를 앞에 두고 다른 멤버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고, 비혼 여성들에겐 서장훈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다른 MC들은 그를 지탄하며 만류하는 동시에 게스트에게 김구라가 던진 의혹에 대한 ‘해명’을 재촉한다. 김호영, 조나단 등 예능 신인을 발굴하며 새로움을 꾀하다가도 금세 굳어져버린 공식으로 되돌아간다. ‘김구라 잡는’ 게스트로 출연했던 안영미가 12년 만에 첫 여성 MC로 합류하게 된 건 그만큼 기존의 ‘라디오스타’와 다른 구도를 보고자하는 시청자들의 바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최근 2주년을 맞은 MBC every1 '비디오스타'는 ‘라디오스타’의 스핀오프에서 시작했으나 현재 독자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초기 ‘비디오스타’의 MC 구성이나 진행 방식은 분명 ‘라디오스타’를 근간으로 했다. 지금도 고수하는 “작가들이 그러는데~”로 운을 띄우며 사전 미팅 때 나온 발언을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해 화제를 삼는 방식은 ‘라디오스타’를 모방한 것이며, ‘비디오스타’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디오스타’는 ‘라디오스타’처럼 게스트에게 재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4명의 MC는 게스트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맞장구를 치며 호응하고, 첨언하느라 말을 끊는 대신 듣는 데에 집중한다. 자신들의 미담이나 능력을 과시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낮추며 게스트의 장점을 부각시키려 한다. 박소현이 친절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면, 김숙과 박나래가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분위기를 달구는 식이다. 이는 눈에 띄는 재미를 유발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논란의 위험성도 낮다. ‘토크’ 프로그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치료비라고 생각하고 (돈을) 드릴게요”라는 스윙스의 말처럼, ‘비디오스타’는 게스트가 마음껏 속풀이를 할 수 있는, 여타 예능에서 보여주지 못했거나 편집됐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준다. 뮤지컬이나 신곡 홍보를 위한 시간도 넉넉한 편이다. 양미라, 김진, 20년 만에 예능에 출연한 미스코리아 출신 장윤정까지, 오랜 공백기를 가졌던 이들이 복귀작으로 ‘비디오스타’를 선택하는 이유일 것이다. 손경이 관계교육연구소 대표가 '유모차'를 '유아차'로, '미혼'을 '비혼'으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하며 젠더 감수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비디오스타’는 ‘라디오스타’처럼 자극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라디오스타’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가을동화’와 ‘남자친구’

KBS ‘가을동화’는 2000년 9월 18일에 방영을 시작했다. 당시 송혜교는 윤준서(송승헌)와 한태석(원빈)이 연기한 남자 캐릭터들의 사랑을 받는, 그러나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행복할 수는 없는 비련의 주인공 최은서를 연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그 유명한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정확하게는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도 이 드라마에서 나왔다. 한태석은 최은서를 벽에 밀어붙이며 이 대사를 말했고, 당시에는 시청자들을 설레게 하는 대사로 꼽혔다. 당시 신인이던 원빈이 더 큰 주목을 받게 되는데는 이 대사의 역할도 일정 부분 있다. 애초에 이 대사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 자체가 당시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 대사를 ‘남자의 멋있는 고백’의 전형쯤으로 묘사하며 패러디했기 때문이다. 한태석의 대사와 행동이 두 사람 사이의 복잡한 감정에서 나온 위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돈으로라도 널 갖고 싶다는 발언이 오히려 배우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시대였다.

tvN ‘남자친구’는 2018년 11월 28일에 방영을 시작, 2019년 1월 24일에 종영했다. 흘러간 시간 만큼이나 주인공인 송혜교와 박보검은 ‘가을동화’와는 상반된 관계를 보여준다. 송혜교는 뛰어난 능력의 호텔 경영자가 됐고, 박보검은 가난하지만 착한 성품을 가진 채 열심히 살아가려는 신입사원이다. 작품 초반 김진혁(박보검)은 차수현(송혜교)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잡으려다 사과한다. 그렇게 여자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재력을 과시하는 대사가 설레는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변화한 시대상을 따라가되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차수현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이혼했다는 이유로 미디어의 가십거리로 자주 오르내리고, 그가 김진혁을 좋아하게 된 뒤부터는 온갖 시선들로 인해 마음 놓을 곳이 없다. 그가 중요한 사업 파트너를 만날 때 불편한 하이힐을 신어야 하는 것부터 그가 여자로서 겪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뛰어난 여자인 차수현이 겪는 이런 문제들을 회피한다. 대신 그가 전 시어머니(차화연)의 압박에 힘들어하면, 김진혁이 그것을 순수한 사랑으로 돌파하는 상황을 반복한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그의 전 남편(장승조)이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차수현의 캐릭터가 남자였다면 이런 전개가 가능했을까. 또한 사회적으로 어느 하나 나은 것 없는 김진혁이 차수현을 리드하듯 움직이고, 그것을 멋진 행동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남자친구’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성별 역할을 뒤집었지만, 캐릭터의 묘사는 기존 작품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것은 ‘남자친구’의 역설적인 의의이기도 하다. 이 정도로 뻔한 작품도, 어쨌든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목록

SPECIAL

image Mnet 악행전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