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은 왜 ‘쇼미더머니’에 먹혔나

2019.08.23
한국 힙합이 ‘쇼미더머니’ 체제 아래 움직인 지도 꽤 오래됐다. 거대 미디어 커머스 기업 CJ ENM의 음악 채널인 엠넷은 기성 래퍼들과 래퍼 지망생들을 불러 모아 막강한 돈의 힘을 보여주며 신을 재편했다. 그 결과 현재의 한국 힙합 신은 계급사회나 다름없다. PD와 (프로듀서라 불리는) 소수의 아티스트가 권력을 쥔 그 안에선 매년 달콤한 미래를 꿈꾸며 번호표를 단 피권력 래퍼들의 생존 경쟁이 벌어진다.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힙합 신의 모습이다. 올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제작진에게 선택된 프로듀서들은 권력놀이에 흠뻑 빠져있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수많은 래퍼들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프로와 아마추어, 래퍼와 지망생이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대혼돈의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맘때 즈음 ‘쇼미더머니’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 사이에서 나오는 질문도 변함없다. “한국 힙합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즉, “왜 ‘쇼미더머니’에 먹히게 되었는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 아티스트, 장르 팬 할 것 없이 입을 모으는 답이 하나 있다. “힙합을 알리고, 힙합 아티스트가 노출될 수 있는 제대로 된 창구가 없다.”라는 것. 일견 맞는 듯 보인다. 드렁큰 타이거의 ‘Good Life’가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최초의 랩/힙합 1위곡이 된 지 무려 20여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한국에서 힙합은 오랫동안 마이너 취급을 받아왔다. 1998년에 KBS에서 제작한 ‘KBS 제3지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가 오늘날까지도 한국 힙합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지상파 다큐멘터리로 거론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쇼미더머니’ 이전에 방송에서 접할 수 있는 힙합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과연 이 같은 현실이 힙합에만 해당되는가? 알앤비, 록, 재즈, 일렉트로닉 등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한국의 미디어가 무관심하여 다루길 꺼려하거나 외면한 건 비단 힙합뿐만이 아니다. 다른 장르 신의 상황도 매한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니아층이 두터워지고 장르 커뮤니티가 활성화됐던 ‘쇼미더머니’ 이전의 힙합 신은 타 장르 신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답은 이렇게 바꿔야 타당하다. “예전부터 한국 미디어 중엔 (아이돌을 제외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아티스트를 노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창구가 없었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국 대중음악계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한국 힙합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장르와 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가 타당한 것인가? 또한, 온갖 왜곡과 자극적인 연출 덕에 대중화가 된다 한들 이른바 ‘행사 머니’를 버는 래퍼와 래퍼 지망생들 외의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힙합을 대중화시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난 그것이 그토록 절실한 당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한국 힙합 신 내부에서 찾아야한다. 최초 힙합이 탄생한 건 파티장이었지만, 그 배경엔 특수한 사회환경이 깔려있다. 인종과 계급 이슈를 빼놓고는 힙합을 논할 수 없다. 세대에 걸쳐 백인들이 가한 억압과 차별은 흑인 사회가 강력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됐고, 그 안에서 힙합은 음악을 넘어 흑인들만의 문화로서 움트고 발전했다. 그렇기에 힙합은 한국에서 자유로 통하는 것과 달리 래퍼 로이스 다 파이브나인(Royce Da 5’9”)도 말한 것처럼 매우 편향적이고 폐쇄적인 장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착취와 탈취의 역사의 실제 피해자이기도 한 힙합 아티스트들은 본인들이 만들어낸 고유한 문화를 왜곡하거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매우 민감하게 대응해왔다. 멀게는 백인 사업가들의 힙합 시장 진출에 맞서 흑인이 주인인 레이블과 미디어를 만들어낸 것, 가깝게는 타인종 래퍼들의 진입에 매우 까다롭게 반응하는 것 등이 좋은 예다. 심지어 같은 흑인 아티스트라 하더라도, 힙합을 왜곡하거나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위엔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고 설전을 벌인다. 시대가 바뀌면서 래퍼들의 가치관도 변했지만, 힙합을 향한 외부 공격(?)엔 예나 지금이나 아티스트가 앞장서서 맞서왔다. 이는 의식적으로 사수하려 한 것보다 자연스레 발현된 쪽에 가깝다. 미국에서 힙합은 흑인 개개인의 삶은 물론, 그들의 사회, 문화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힙합의 4대 요소가 사실상 해체되고, 2000년대 들어 완전한 주류 대중음악이 되었지만, 문화로서의 근간이 여전한 건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힙합은 단지 대중음악의 여러 장르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많은 래퍼들과 팬들 역시 ‘힙합은 문화다!’를 외쳐왔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힙합이 전파되며 이식된 맹목적인 구호나 다름없다. 당장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유명 래퍼들 중에 “어째서 힙합이 (한국에서도) 문화인가?”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힙합과 비슷하게 문화로서 뿌리내렸던 신은 프랑스, 독일, 영국처럼 인종적 갈등, 빈민가, 갱 등의 요소가 갖춰진 극소수의 나라뿐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한국의 래퍼들에게 힙합과 문화의 상관관계는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힙합을 문화로서 논하자면, ‘십대, 혹은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얘기에 그치고 만다.

무엇보다 래퍼 대부분에게 신이란 공동이 일군 문화의 터전이기에 앞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이다. 직장이란 소리다. 그래서 힙합에 대한 왜곡이나 가치 훼손이 개인의 생계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힙합 수호자를 자처할 이유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더구나 지금은 왜곡에 순응하고 힘을 보태야만 연명할 수 있다. 멋지게 랩을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멋지게 랩을 뱉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목을 끌어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래퍼들이 힙합과 신의 가치를 논한다. 그러나 접점이 희미하다 보니 공허한 말들만 맴돌다 사라진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쇼미더머니’에 투신한 현실은 한국 힙합 신에 만연한 래퍼들의 자기기만만을 확인케 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힙합 신을 주도하는 이들이 힙합을 왜곡하고 저급한 시스템을 구축한 ‘쇼미더머니’를 기회의 땅으로 삼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었다.

결국, 한국 힙합이 ‘쇼미더머니’ 하나에 휘둘리게 된 것은 애초부터 한국 힙합의 가치나 멋을 지켜야 할 아티스트들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이 한국 힙합의 본모습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설령 내일 당장 ‘쇼미더머니’가 끝난다 해도 이 같은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추후 제2의 ‘쇼미더머니’가 나온다면, 똑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한국 힙합은 딱 그 정도 수준인 것이다. 어쩌면 우린 아주 오랫동안 ‘힙합은 문화’라는 허상 속에서 허우적거려 온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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