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 전진!│② 기억해야 할 여성 영화 감독의 작품 다섯

2019.08.20
‘2018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연구원의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총제작비 10억 원 이상 또는 최대 스크린 수 100개 이상의 상업 영화에서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이는 전년 대비 4.6% 증가한 것이지만, 영화계 내 성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많은 영화인들이 충무로의 현실을 토로한 대로, 투자자들은 여성 감독에게 연출 기회를 맡기는 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른바 ‘여성적’인 감성을 내세운 장르만을 잘 소화한다는 케케묵은 편견도 잔재한다. 하지만 충무로에는 많은 제약을 딛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여성 감독들이 계속 배출돼 그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여성 감독 5인, 그들이 남긴 5편의 작품을 꼽아 보았다. 기사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질 그들의 근황도 함께 전한다. (단, 1990년대 이전 작품은 제외했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1993~1999)
JTBC ‘방구석 1열’에서의 활약으로 대중도 꽤 얼굴을 알아보는 감독이 된 변영주는 초창기에는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93년 발표한 제주도의 기생 관광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의 첫 연출작. 이 작품을 만들다 알게 된 한 여성의 어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장장 5년에 걸쳐 일본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연작 제작에 몰두한다.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을 찾아 그들의 육성을 필름에 채록한 작품이다. ‘위안부’가 역사 깊은 성차별에서 비롯된 ‘여성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한 이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한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가 됐다. ‘낮은 목소리2’(1996)는 ‘나눔의 집’이 서울 근교 농촌으로 이사한 후 할머니들이 직접 감독을 다시 부르면서 탄생했다. ‘낮은 목소리 3– 숨결’(1999)에 이르러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서로를 인터뷰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연작을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연애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할머니들이 카메라와 가까워질수록 ‘낮은 목소리’ 연작은 고통스런 역사를 영화 매체에 소환하는 데 필요한 윤리를 완성해갔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고통을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카메라는 할머니들이 일상을 이어가는 현재에 초점을 맞춰 나간다. 이후 변영주 감독은 멜로(‘밀애’)부터 성장물(‘발레 교습소’), 스릴러(‘화차’)까지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며 상업 영화계에 안착했고, 현재 강풀 작가의 ‘조명가게’를 영화화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임순례 감독의 작품에는 늘 소외되고 결핍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장편 데뷔작 ‘세 친구’(1996)에서 갓 20대가 된 청년들은 시대의 폭력에 으스러졌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은 비인기 스포츠 핸드볼을 하는 30대 여성들의 눈물과 땀을 담았다. 특히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임순례 감독이 명필름과 협업하며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 몸담은 첫 작품이자,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성취한 그의 최고작이다. 청춘을 회고하는 중년의 씁쓸한 현재를 담은 일련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코 빛난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하게 됐지만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중년 남자들의 풍경이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인 이미지로 전달된다. 또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좋은 배우를 발굴해낸 감독의 선구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밴드의 일원을 연기한 황정민을 시작으로, ‘동숭무대’에서 연극을 하던 박해일이 충무로에 진출해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게 됐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계속 연기를 해도 될지 확신이 없던 류승범이 배우의 길을 계속 걷게 된 계기가 됐다. 한편 임순례 감독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리틀 포레스트’ 등이 상업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여성 감독 작품은 흥행과 인연이 없다’는 근거 없는 편견을 깨는 데 가장 크게 일조했다. 내년 상반기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교섭’(황정민, 현빈 주연)은 중동 지역에서 납치된 한국인 인질을 구하려는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의 이야기다. 대중과의 호흡을 놓지 않는 임순례 감독의 강점이 기대되는 프로젝트다.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2009)
홍형숙 감독은 그 자체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다. 1980년대 진보 성향의 한국 독립 영화 운동 집단‘서울영상집단’에서 ‘전열’, ‘54일,그 여름의 기록’등의 제작에 참여하며 노동 문제를 기록했고,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농촌 공동체를 담은 ‘두밀리:새로운 학교가 열린다’를 연출했다. 그의 대표작 ‘경계도시2’는 한국 다큐멘터리가 거둔 중요한 성취이자, 그해 베스트 목록에 빠지지 않던 마스터피스다. 전편 ‘경계도시’(2002)가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35년 만에 귀국하는 과정을 담았다면, ‘경계도시2’는 대한민국 전체로 눈을 돌린다. 국가정보원은 그가 단순한 반체제인사가 아니라 북한의 권력 서열 23위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 위원 김철수와 동일인이라 규정한다. 그가 노동당 입당 자체는 사실이라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호의적이었던 여론은 뒤집히고,진보 매체까지도 그를 최대의 거물 간첩으로 간주한다. 보수 진영이 진보를 공격하기 위해 송두율 논란을 이용하는 것은 예상 가능한 그림이지만,진보 측마저 다음 해 총선을 생각하면 ‘경계인’이란 정체성을 내세울 수 없다며 송 교수를 몰아간 것은 충격적이다. 결국 이 땅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남한 체제 안에 정확히 흡수되어야 한다며 ‘강제적 전향’을 권하는 부끄러운 일이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졌다. ‘경계도시2’는 감독 자신의 혼란까지도 담아내며 대한민국의‘레드 콤플렉스’를 다각적으로 담고,이념과 선거가 한 개인의 주체성을 짓밟는 모순을 참담하게 기록했다.현 시대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 홍형숙 감독은 지난해부터 DMZ국제다큐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후배들의 좋은 다큐멘터리를 발굴하는 데 힘쓰고 있다. 또한 도심형 대안학교 성미산 학교의 자폐 범주성 장애를 가진 학생 준하를 1여 년간 지켜보며 완성한 ‘준하의 행성’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화제를 모았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2015)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부터 최근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아이유 주연의 ‘페르소나’(2019) 속 단편 ‘러브 세트’까지, 이경미 감독은 주류 상업영화에서 거의 건드리지 않던 여성들의 얼굴에,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기어코 카메라를 들이댄다. 누군가는 이런 영화가 불편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 여자들을 스크린에 소환하는 이경미 감독의 뚝심은 ‘비밀은 없다’에서 만개하며 특기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비밀은 없다’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배신하는 영화다. 포스터를 보고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든 전직 스타 앵커 종찬(김주혁)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은, 딸 민진(신지훈)의 실종사건 이후 ‘막 나가는’ 전개에 당황하게 된다. 종찬의 아내 연홍(손예진)이 파헤치는 중학생 민진과 미옥(김소희)의 세계는 ‘미쓰 홍당무’의 비호감 안면홍조증 양미숙(공효진)보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복잡하다. 이경미 감독은 컷과 컷을 이상하게 충돌시키고,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음향을 틈입시키며 만드는 파열음으로 이 세계를 독창적으로 구현해냈다. 관객 수 25만 명으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씨네21’은 이례적으로 ‘이대로 보낼 순 없다, ‘비밀은 없다’를 둘러싼 이야기들’ 특집을 기획해 영화를 적극 지지했고, 뒤늦게 IPTV로 영화를 접한 후 ‘비밀은 없다’의 당혹스러움에 반가움을 표하는 마니아들이 나타났다. 유독 여성 캐릭터를 납작하게 다루는, 안전한 연출을 택하는 한국 영화계에는 이경미 감독의 개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비밀은 없다’로 그가 좀더 영화를 자주 만들어야할 이유를 증명한 그는 현재 정유미, 남주혁과 함께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의 드라마판을 연출하고 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
이 기사를 작성하는 순간에도 세계 영화제 수상 이력이 ‘또’ 업데이트됐는지 계속 체크해야 하는 작품. 8월29일 국내 개봉을 앞둔 ‘벌새’는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plus 부문 대상을 비롯해 전 세계 영화제에서 25개의 상을 받았다(8월18일 기준). 이는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2008)가 해외 영화제에서18관왕을 차지한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을 보인 ‘벌새’는 부모와 오빠, 언니로부터 원하는 애정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은희(박지후)가 자신의 세계를 발견해가는 성장담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1994년을 배경으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반영돼 있다. 이렇듯 가장 개인적인 소재에서 출발한 사적인 영화이지만, 김보라 감독의 섬세한 필치는 ‘벌새’를 아주 보편적인 드라마로 승화시킨다. 독립 영화로 업계에서 주목받은 후 상업 영화계에 진출한 이들이 있다. 가령 ‘힘내세요, 병헌씨’를 연출한 이병헌 감독은 ‘스물’에 이어 ‘극한직업’으로 1600만 관객을 웃겼고,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은 제작비 100억대 SF 영화 ‘사냥의 시간’ 개봉을 준비 중이다. 138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흡인력을 보여주는 ‘벌새’는 신인 감독이 가진 상업 영화 감각까지 엿보게 한다. 앞으로도 꾸준히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고, 염두에 두고 있는 장르 중 SF도 있다는 김보라 감독이 보다 많은 관객을 만날 미래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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