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이브’, 쫓는 여자와 죽이는 여자

2019.08.12
‘킬링 이브’의 제작자 피비 윌러-브릿지는 이 극을 “살인과 외로움에 관한 명상이자, 양심이 부재하는 세상으로 제시되는 가능성이다.”라고 요약했다.
싸이코패스 암살자를 뒤쫓는 비밀 요원의 이야기니만큼 살인을 얘기할 일이 많을 것은 당연하다지만 ‘명상’이라는 단어에 눈이 간다. 킬링 이브는 영국 정보국 MI5 소속 이브 폴라스트리(산드라 오)가 수사에 뛰어들면서 겪는 도덕적 갈등과 감정 변화들을 명상하듯이 진지하게 고찰한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관능적인 삽입곡과 함께 암살자 빌라넬(조디 코머)에게 이브가 느끼는 호기심과 성적 끌림을 내밀하게 묘사한다. 이 시리즈가 평단과 시청자를 단번에 사로잡은 구체적인 비법은 무엇일까.

금기를 깨트리는 긴장감과 더불어 주연 배우 둘의 케미스트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시리즈 최고의 백미다. 산드라 오는 골든글로브와 비평가협회상, 전미배우조합상 여우주연상 3관왕을 거머쥐어 뛰어난 연기력을 거듭 검증받았다. 그가 연기하는 이브는 똑똑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다. 가상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감정 표현 덕에 시청자는 이브의 시선에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 ‘GQ’는 시즌 2에 와서 더욱 깊이있게 캐릭터를 조형한 조디 코머가 킬링 이브라는 극을 최전선에서 지배적으로 이끌어냈다고 평했다. 그의 빌라넬은 표정과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뒤바꾸며 모든 상황에 녹아 들어가는 유능한 암살자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순수하리만치 동물적 욕구에 충실한 그는 상상도 못한 곳에서 조커처럼 판을 순식간에 뒤집고 흔든다.

애틀랜틱은 ‘킬링 이브’가 어떤 하나의 장르라고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장르를 한데 모아 창의적이고 조화롭게 구성한 점을 꼽아 호평했다. 기본적으로는 선한 주인공이 악한 살인범을 뒤쫓는다는 고전적인 수사물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투탑 주인공을 모두 여성으로 채택하여 체제 전복적인 재미를 줬다. 긴장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자신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양새는 스릴러이기도 하고 코미디이기도 하다. 저녁 한 끼 얻어 먹자고 수사관의 집에 숨어드는 살인범 빌라넬과 맥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이브의 첫 대담 장면은 사실상 첫 데이트라는 점에서 실소 터지는 유머를 제공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간을 쫄깃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첫 에피소드에서 이브는 살해당한 오만한 정치가가 평소 거들떠도 보지 않을 사람인 여성을 귀신 같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다. 여성의 촉에 근거한 주장은 빠르게 무시된다. 오직 이브만이 범인을 쫓을 수 있다는 당위성이 확보된다. 이브가 멋대로 무리하게 수사를 감행했다가 해고됐을 때, 이브의 끈기와 능력을 높이 사고 재수사의 기회를 제공하는 건 비밀첩보국 MI6의 여성 부장이다. 빌라넬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얕잡아 보이는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타깃에게 접근해 가차없이 살해한다. 이들 모두는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투사이기보다 희로애락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묘사된다. 열 살짜리 아이부터 환갑 넘은 국장까지 모든 캐릭터가 확고하고 개성 있다. 이들이 여성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여성의 이야기로서 킬링 이브는 최고의 매력을 뽐낸다.

전미배우조합상 시상식 자리에서 산드라 오는 이브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스스로의 어둠과 그림자를 포용하세요. 그걸 위한 자리를 따로 만들어두지 않으면, 언젠간 당신을 찾아와 파괴할 테니까요. 이브를 덮쳤듯이 말이에요.” 이제사 제목을 돌아보면 ‘도대체 무엇이 이브를 죽이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는 싸이코패스조차도 내면에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이미 세상의 많은 부분은 양심을 잃었거나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유지하고 있다. 외로움에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킬링 이브’라는 명상을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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