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클│① 21년동안 더 좋아진 그룹

2019.07.30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다 메모해둔 구절이 핑클의 예능 프로그램 JTBC ‘캠핑 클럽’을 보다 문득 떠올랐다. 1998년 데뷔한 핑클의 실질적인 그룹 활동은 2002년에 끝났다. 공식 해체를 발표한 적은 없지만 4집 앨범 발표 이후 멤버들은 개인 활동에 집중했고, 2005년 디지털 싱글을 발표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핑클의 일원으로 TV에 얼굴을 비춘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세월이 훨씬 길다. 하지만 ‘캠핑 클럽’에서 멤버들이 언급하듯, 이 시기를 함께 보낸 동료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도 틈 없이 편안하다. 이효리와 이진이 어색한 관계였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인지 역으로 보여준다. 적게는 18살, 많게는 20살 때 데뷔한 이효리, 옥주현, 이진, 성유리는 서로 성격이 맞는지 대화는 통하는지 짐작할 겨를도 없이 ‘핑클’이란 이름으로 묶여 24시간 함께하면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SBS ‘힐링캠프’, MBC ‘라디오스타’ 등에서 이효리는 성격 차이로 이진과 머리채를 잡고 싸운 일화를 전했다. 그랬던 만 4년의 세월이 인생의 다른 4년과 확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정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핑클은 급조된 그룹이었다.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아이돌에 멤버 수 하나를 더해서 라이벌 그룹을 만든다는 소문도 있었던 구 대성기획, 현 DSP미디어는 S.E.S. 데뷔 후 새 걸그룹을 준비했다. PC통신으로 그룹명 공모를 낸 후 ‘핑클’이란 이름이 발탁됐다. 이효리는 다른 기획사에서 가수를 준비하다 핑클 데뷔 한 달 전에 합류했다. 나는 노래도 춤도 제대로 배울 기회 없이 데뷔한 핑클의 첫 무대를 실시간으로 봤다. 이진과 성유리는 노래를 못했지만 세상에 저렇게 이쁜 사람이 다 있나 싶을 만큼 예뻤고, 옥주현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뽐내기 연장원 출신답게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보여줬으며, 이효리는 예쁜데 노래도 곧잘 하는 ‘밸런스 캐릭터’였다. 그 방송을 비디오에 녹화해 다시 몇 번이고 돌려보다가 1집 CD도 산 기억이 난다. S.E.S.의 아성을 위협하기에는 미지근한 반응에 그쳤던 데뷔곡 ‘Blue Rain’에 이어 야심차게 내놓은 ‘내 남자 친구에게’는 핑클이 막강한 남성 팬덤을 거느리는 계기가 됐는데, 또래 여자애 중에는 “늦은 밤 헤어지게 될 때면 아쉬운 너의 마음 털어놔”, “난 니꺼야” 같은 가사가 왠지 불쾌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또한 핑클은 S.E.S.를 좋아한다면 왠지 마음을 줘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룹이었고, 멤버 개개인의 실력이나 앨범의 완성도는 S.E.S.가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는 ‘S.E.S 파’의 충성심도 단단했다. 무엇보다 남자 아이돌 팬들은 오빠들과 열애설이 났거나 혹은 잠재적 열애 대상인 것만 같은 핑클을 질투했다. 그럼에도 핑클이 출연하는 예능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있었는데, 도대체 어디가 ‘국민 요정’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필터링 없는 털털함은 지금 다시 봐도 끝내준다.

2003년부터 ‘캠핑 클럽’으로 핑클이 재결합한 2019년까지, 이효리, 옥주현, 이진, 성유리는 각자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왔다. 이효리는 솔로 가수와 예능인으로 모두 성공했고, 옥주현은 뮤지컬계 티켓 파워 1위의 배우가 됐으며, 이진과 성유리는 꾸준히 드라마에 얼굴을 비췄다. 그 사이 H.O.T., S.E.S., 젝스키스, 핑클, 신화 등을 좋아했던 세대 역시 어느덧 나이를 먹고 90년대 가수를 회고하는 MBC ‘무한도전’의 ‘토토가’에 열광하는 ‘늙은이’가 됐다. 그리고 90년대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새롭게 지각되는 순간을 수없이 경험했다. 10대 시절은 도시락 반찬부터 책상 위 낙서까지 아주 사소한 것도 기억날 만큼 깊은 인장을 남기기에 더욱 그랬다. 아직 충분하지만 않지만 어떻게든 세상은 나아지고 있었다. 귀밑 5cm 머리 길이, 양말은 흰색만 입으라는 규정이 사라지고 교사에게 심한 체벌을 받고 성희롱을 당하면 참지 않는 시대가 됐다. 어쩌다 TV에서 옛날 드라마 재방송을 보게 되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이른바 ‘나쁜 남자’의 온갖 폭력적인 언사가 매력으로 포장되고 여자는 울면서 사랑을 기다리는 게 뭐 그리 로맨틱하다고 열광했던 건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진 세상에서, 전보다는 성장한 후 만난 ‘캠핑 클럽’은 (‘토토가’가 지겹게 했던) 90년대의 낭만적 회고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철부지 10대 시절을 지난 후 다시 만난 핑클 완전체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있는 여성들이었다. 연습생 기간 없이 가수 데뷔를 했고 립싱크를 했다며 허탈하게 웃는 모습은 아직 조악했던 90년대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상기시켜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멤버들이 1집 수록곡 ‘루비’의 가사를 하나하나 곱씹다가 몸서리치게 싫어할 땐 박장대소했다. 바람 피운 남자친구와 새 애인의 머리채를 잡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그래 널 보내주겠어/그 무엇도 바라지 않아/나를 위해 힘겹게 널 내 곁에 두는 것보다/널 위해서 내가 떠날게”, “I CAN'T CRY/언제든 다시 돌아와/난 여전히 너의 여자야”라며 청승 떠는 ‘루비’의 화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암흑의 역사다. 성유리가 “수동적이야, 애들이. 우리 스타일이 아니네. 우린 몰랐네”라며 웃을 때, 문득 핑클을 시샘했던 우리 세대의 치부가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핑클이 SBS ‘인기가요’에서 ‘루비’로 1위를 한 1998년 어느 날, 당시 객석에 있던 다른 아이돌 팬들은 그들의 면전에 대고 “꺼져라”라고 소리쳤다. 이는 실시간으로 전파를 탔다. 물론 그 시절 남자 아이돌을 좋아했던 모든 사람이 이런 끔찍한 일을 직접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가 그광기에 침묵한 만큼 이런 일이 잘못됐다는 진지한 자성도 없었다.

21년 전만 해도 몰랐다. 핑클이 1세대 대표 아이돌 중 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그룹으로 남아 “좋아했던 것을 쪽팔리게 하지 않는” 이들이 될 거라는 것을. 시작은 졸속에 가까웠지만 모든 멤버의 개인 활동이 자리 잡고 특히 이효리가 21년째 톱스타의 자리를 유지하며 어떤 존경심마저 품게 만들 거라는 것을.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이를 깔깔 웃으며 추억하고 ‘배란일’을 주제로 야한 농담을 하는 핑클 네 사람은 당시 TV에 나오는 그 누구보다 이입 가능한 친근한 언니들이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때보다 많은 기억을 잔존시키는 학창 시절의 한 조각에 항상 핑클이 있었다. 그때는 미성숙해서 미처 몰랐던 미안함을 꾹꾹 눌러 담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난 21년간 우리가 깨지고 버텨내고 어제보단 나은 사람이 된 것처럼 이효리, 옥주현, 이진, 성유리 역시 인생의 다양한 파고를 경험했을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그렇기에 ‘캠핑 클럽’은 물론 그 이후 핑클 개개인이 보여줄 모습까지 계속 보고 싶고 궁금하고 반가울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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