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 가족의 허약함에 대하여

2019.07.29
* 영화 ‘미드소마’의 내용이 있습니다. 

‘미드소마’는 처음부터 에둘러 가지 않는 영화다. 작품은 이것이 가족이라는 관계의 비극과 허점에 관한 이야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대니(플로렌스 퓨)는 조울증을 앓고 있는 동생으로부터 의미심장한 내용의 메일을 받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부모에게 전화를 걸지만 자동응답으로 연결된다. 동생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이미 이전부터 대니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왔다는 사실은 대니의 메일함에 쌓인 동생의 메일을 통해, 또 불안해하는 대니에게 지친 듯한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대니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한다. 동생이 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을 겪은 후, 대니는 크리스티안에게 감정적으로 더 의지하려 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반응은 어쩐지 미적지근하다. 대니의 괴로움과 관계없이 크리스티안은 하지제가 열리는 스웨덴의 한 마을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려 하고, 대니는 굳이 크리스티안을 따라나선다.

그들이 방문한 스웨덴의 호르가는 외부인이 보기에 구시대적 풍습을 가진 수상한 공동체다. 더없이 목가적인 풍경 아래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 혹은 가족이라고 부르며 바깥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 공동체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다 같이 커다란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하거나 한 건물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는가 하면, 아이를 공동으로 돌본다. 72세가 넘는 구성원은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져 얼굴이 엉망으로 짓이겨진 모습으로 목숨을 끊어야 하지만 호르가인들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성관계 역시 개인과 개인의 욕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유지를 위한 재생산이라는 뚜렷한 목적 아래 다른 구성원들이 보는 앞에서 철저히 기능적으로 진행된다. 혈연보다는 엄격한 규율과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호르가는 지탱되고, 그런 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항의하거나 무시하는 외부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공동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광적인 종교 집단에 가까운 호르가에서 대니와 크리스티안을 비롯한 방문자들은 결코 스스로 벗어날 수 없으며, 끔찍한 사건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그런데 ‘미드소마’의 공포는 단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호르가의 분위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곳에서 크리스티안이 언제든 대니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야말로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공포다. 영화 초반부터 대니와 헤어지라는 조언을 친구들에게서 꾸준히 들어온 크리스티안은 생일마저 잊을 정도로 대니에게 무심하며, 대니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호르가에서 끔찍한 사건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대니를 위로해주거나 안심시키기는커녕 자신의 연구를 위해 대니의 감정을 돌보지 않거나 다른 친구까지 배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호르가 여성의 유혹에도 쉽게 흔들린다. 크리스티안이 호르가에 자신만 버려두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계속 시달리던 대니는 혼자 남겨지는 악몽까지 꾼다. 요컨대 ‘미드소마’는 독점적 애정 기반의 관계를 상대방이 먼저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수상한 곳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를 저울질하며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는 어느 쪽이 더 무섭게 다가오는지 묻는다.

호르가의 공동체는 애정이나 혈연으로 뭉치지는 않았지만 규칙이 있고, 그 안에서 재생산이 가능하며,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다소 의례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감정적 교류를 나누기도 한다. 크리스티안이 호르가의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대니가 목격하고 절규할 때, 호르가의 다른 여성들은 대니를 둘러싸고 큰 소리로 함께 울어준다. 대니의 가족은 대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믿었던 크리스티안은 대니의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혈연, 애정을 배제한 공동체와 혈연, 애정 기반의 가족 중 어떤 것이 더 우리에게 유용할까? 가족이 호르가 같은 공동체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 구성원들이 영원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기댈 구석이 되어주며 살아가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72세가 되면 목숨을 끊는 일을 축복으로 여기는 호르가의 풍습은 기이하지만,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보다 덜 끔찍하리라는 보장은 있을까? (심지어 대니의 동생처럼 다른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경우라면?) 더 나아가, 특정 공동체에서 가족의 기능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면 가족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리 에스터 감독은 ‘미드소마’를 통해 가족에 대한 심술궂은 질문을 연달아 던진다.

대를 이어 저주받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아리 에스터의 전작 ‘유전’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악령의 존재나 신체 절단의 이미지보다,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가족(특히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진실에 대한 폭로였다. ‘미드소마’는 가족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한층 더 잔인하게 무너뜨린다. 애정은 언젠가 변하기 마련이고, 그런 불안정한 애정을 기반으로 가족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높은 확률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나눈 애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가족 역시 나머지 구성원을 선택할 수 없지만 혈연과 제도로 묶였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함께 고통을 짊어져야 하기에 비극을 낳게 된다. 물론 광적인 종교 집단과 혈연 기반의 가족을 극단적으로 비교한 것은 아리 에스터의 짓궂은 농담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신화화하기보다 그 관계의 허약함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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