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 지정생존자│② 전 국회의원 보좌진이 본 ‘60일 지정생존자’

2019.07.23
원작 ‘지정생존자’는 미국 대통령 신년 국회 연설 중 의사당 폭파로 정부, 의회 주요 관료가 한 번에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끔찍한 테러임이 분명하지만, 그 광경을 압도하는 정서는 사라져야 할 것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의 카타르시스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구태한 정치의 붕괴를 가장 속 시원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정생존자로 행사 참석에서 제외되었다가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한 학자 출신의 비정치적 인물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이 국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권력의 지속이 아닌 국가의 지속을 목표로 하는 정치의 탄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정생존자'의 리메이크 판인 tvN ‘60일 지정생존자’는 원작과는 정 반대에 있다. 이 드라마는 박무진(지진희) 환경부 장관이 국회의사당 테러로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게 된 이후를 보여주는 일종의 영웅설화다. 원작이 타개하려 한 대상은 국민을 주변화 하는 구태 정치지만, ‘60일 지정생존자’가 목표로 삼은 것은 ‘남자답지 못함’이다. ‘60일 지정생존자’는 박무진이 얼마나 ‘남자답지 못한가’를 설명하는 데 드라마 초반부를 거의 할애한다.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운전 중인 박무진과 조수석에 앉은 부인 최강연(김규리)이 가운데 콘솔의 물병으로 거의 동시에 손을 뻗는다. 물병은 최강연이 차지한다. ‘아내한테 물도 못 얻어먹는 남편’ 박무진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고, 최강연은 밀린 업무 처리에 집중하며 ‘돈 좀 번다고 유난을 떠는’ 모습을 보여준다. 뒷자리에 앉은 중학생 아들은 ‘아버지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창밖만 보고 있다. 남자라면 한 번쯤 놀아봐야 할 ‘큰 물’인 외교 협상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부처에서는 ‘신데렐라’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데 박무진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후 사면초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비서실장, 합참의장 등 ‘우두머리 수컷’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과의 인정투쟁에서 승리하며 능력치를 키운다.

‘60일 지정생존자’를 포함한 대다수 한국 정치 드라마들은, 정치라는 소재를 알파메일 서사의 클리셰로 이용한다. 결투를 통해 ‘누가 더 강한가’를 판정하고 서열을 매기는 것이 서사의 목적이다. 승자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한다. 인간은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로 양분된다.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정치권은 엄청난 계략과 음모가 판치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 ‘내부자들’ 같지 않다.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국회 보좌진들은 한국의 정치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60일 지정생존자’에 대해 동료들과 나눈 유일한 대화는 “안 본다”였다. 한 달 먼저 방영된 정치 소재 드라마 ‘보좌관’에 대해서는 그래도 얘기가 좀 있었다. 신민아와 이정재가 국회의원회관 엘리베이터에 CCTV가 없다며 키스를 한다는데, 그게 진짜냐는 거였다. 알아본바 아니었다. 국회의원회관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있다.

한 저명한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들려준 적 있다. “한국 정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60일 지정생존자’가 이상적인 정치 드라마가 되지 못한 탓에는 한국정치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정체 없는 것을 정체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독재 정권을 20년에 한 번씩 시민이 피와 땀을 흘려 끌어내리고, 정당 원내대표 단 한 사람이 단식투쟁을 하면 6천여 명이 일하는 국회가 멈추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에게도 ‘지정생존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정치와 사회에 대한 시민의 열망과 요구를 구현하고 대안을 그려볼 기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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