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2019.07.15
6살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뽀로로를 틀었다. 뽀통령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조카만큼이나 들뜬 마음이었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익숙한 노래가 끝나고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뽀로로, 에디, 루피, 크롱 등 눈에 익은 캐릭터들이 하나, 둘씩 등장해 산과 들을 누비며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해결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세 번째 에피소드가 끝났을 때였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애니메이션인데 왜 루피와 패티는 치마만 입고 나오는 걸까? 같은 또래 어린인데 왜 루피는 친구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지? 왜 루피와 패티는 뽀로로와 크롱, 에디처럼 활동적으로 놀지 않는 걸까? 루피와 패티는 왜 저렇게 자주 토라지는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무릎에 앉아 있는 조카를 옆으로 밀어놓고 휴대폰을 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어는 뽀로로 성차별. 놀랍게도 이런 문제는 뽀로로뿐만 아니라 영유아 컨텐츠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장난감에서도 문제는 예외 없이 거듭됐다. 남아는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등 색상의 선택지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영웅, 과학자, 탐험가 등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캐릭터와 장난감이 권해지는 반면 여아는 분홍색, 보라색으로 잔뜩 뒤덮인 주방놀이, 육아놀이, 화장놀이 등 소위 사회적으로 '여성의 일', '여성성'으로 강요되는 것들이 놀이인 양 주어졌다.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 접하는 사회적 창구인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수동적이고 왕자가 구해주길 기다리는 공주, 꾸미고 치장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서사가 없는 여자 주인공, 엄마만 존댓말 하는 부부 사이. 심지어 해외에서 성 중립적인 캐릭터로 설정되어 성 중립적 이름, 성 중립적 성격, 성 중립적 옷을 입은 주인공이 나오는 그림책마저도 국내로 수입되면서 남자아이로 탈바꿈되어 출판되었고 원서에는 분명 서로 말을 편히 했을 텐데 번역 과정에서 엄마만 아빠에게 존댓말로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도 있었다. 이쯤 되니 아이들을 성차별적인 존재로 길러내려는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나 싶을 정도로 영유아 컨텐츠 세계는 성고정관념을 강요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나답게'가 아닌 '여자답게', '남자답게'를 학습하고 있었고,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가장 처음 공유한 모임에서 한 친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방문한 '페미니즘 서점'을 이야기해주었다. 여자아이를 위한 그림책 코너부터 동성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 LGBTQ 친화적인 장난감까지 있다는 이야기에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어졌다. 검색을 해보니 미국에는 페미니즘 서점이 생각보다 많았다. 고민 끝에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서점까지 갈 필요도 없이 뉴욕 중심에 있는 대형 서점부터 동네의 작은 서점까지, 여자아이들을 위한 책 코너가 따로 있었다. 도전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그림책, 공주를 거부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그림책,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가 소개된 그림책 등등 국내에서 보기 어려웠던 주제의 책들이 많았다. 뉴욕의 어린이 도서관에 앉아 내 허리의 반도 오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내가 어릴 때 이런 그림책을 읽고 자랐더라면, 조금 덜 방황하지 않았을까'라고 자주 생각했다.

미국에서 찾은 그림책 중 괜찮은 것들을 선별해 한국에 가져오며 고민 끝에 큐레이션 서비스를 기획했다. 처음에는 여자아이만을 위한 서비스로 기획을 시작했지만 약 백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많은 양육자들이 아이의 성별을 떠나 영유아 컨텐츠 내 성고정관념 및 성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차별로 인한 문제는 무 자르듯 한쪽 성별에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감정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남자아이들, 피부가 탈까 봐 밖에서 뛰어놀지 않는 여자아이들, 보상으로 여성의 지지와 인정을 받길 바라는 남자아이들, 쟁취하는 것보다 인내하고, 돌보기를 먼저 배우는 여자아이들 등 모든 문제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쪽 성별만을 위한 서비스로 치우치면 안 되었다. 큐레이션 서비스를 위하여 세부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 배제되어야 하는 내용으로 여성성을 강요하는 것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것 역시 항목에 포함되었고, 그러다 보니 가이드라인이 무려 17가지나 되었다. 이 모든 가이드라인을 통과한 그림책이 몇 안되긴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았고,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구상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서비스를 오픈할 수 있었다.

영유아 그림책 정기배송 서비스 '우따따'는 모든 아이들의 건강한 성평등 의식을 응원하기 위해 성평등 가이드라인에 맞춰 그림책을 선별한다. 새는 동물 중 육아를 가장 평등하게 하고, 사람처럼 두 마리의 새가 파트너로 평생을 함께하기도, 또는 혼자 살기도, 가끔은 동성의 파트너가 함께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가족 구성을 가진다. 그중 딱딱한 나무를 뚫어 나무를 좀 먹는 해충을 잡아먹고, 그 안에 안락한 둥지를 마련하는 딱따구리처럼 우리도 단단한 고정관념을 뚫어 아이들을 좀 먹는 성고정관념을 잡아먹고, 그 안에 아이들이 '나답게' 자랄 수 있는 안락한 둥지를 만들어주고 싶어 회사 이름을 '딱따구리'로 지었다. 서비스명도 나무를 뚫는 소리인 '우따따'로 지었다.

서비스 구상 단계에서부터 정식 런칭을 할 때까지 응원의 메세지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내가 어렸을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잘 만들어주세요.’다. 우리 모두 성고정관념과 성차별을 학습하며 자라왔고, 수없이 많은 내 안의 자아와 싸우며 힘들게 ‘나’를 세운 경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우따따 서비스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성과 싸우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과거의 나에게 바치는 선물이기도 하다.

그림책과 워크북만으로 성평등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책을 보던 눈을 들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세상은 잘못된 성고정관념과 불평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 서비스로 인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올바른 성평등 의식을 배운다면, 잘못된 것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 덜 흔들린다면, 성별로 자신의 가능성을 제약하지 않고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걸로도 우리 서비스 존재의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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