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대한민국 국회 이야기

2019.06.24
2019년 X월 XX일, 국회 A상임위원장실 9급 여성 보좌진 ‘국페미’ 씨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8시에 조찬회의가 있어 1시간 전까지는 출근해 사무실 문을 열어놓고 차와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7시 정각, 국페미 씨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탕비실을 살피고 조찬회의가 열릴 소회의실 테이블을 닦았다. 상임위 전체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에도 괜히 한번 들어가 봤다. 마이크 기둥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B당이 보이콧을 해 수 주째 회의가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상임위 의원과 보좌진들이 대책 논의를 하고 소관기관 관계자들을 면담하는 동안 국페미 씨는 혼자서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을 바라보며 그들이 먹을 차와 도시락을 준비하고 전국에서 빗발치는 항의 전화를 받았다. 보좌진 중 국페미 씨만 상임위 관련 업무에서 제외당했으나, 무능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실망을 직접 상대하며 의무적으로 상황을 해명하는 것은 국페미 씨의 일이었다. 국회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허드렛일로 취급했고 허드렛일은 늘 국페미씨의 담당이기 때문이었다.

7시 30분, 도시락 배달 전화가 왔다. 국페미 씨가 카트를 끌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국이 담긴 통이 샐까 봐 조심하며 도시락이 담긴 큰 박스 두 개를 카트에 옮겼다. 부피 때문에 바퀴가 헛돌아 두 손으로 카트를 끌었다. 국회에서 여성에게 허드렛일이 강제된다는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무거운 건 남자가 들지 않아?”라고 반문했다. 국페미 씨는 코웃음을 쳤다. 무거운 짐 옮기기, 컴퓨터 등 각종 기기 및 설비 관련 문의와 같은 ‘전통적 성역할’에서 남성의 일로 구분되어 온 것들도 대부분 여성이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메시지가 도착했다. “페미 씨 회의 자료 출력 좀요^^” 국페미 씨와 동갑인 남자 7급 보좌진 C였다. 같은 대학을 졸업했고, 비슷한 시기에 인턴으로 국회에 들어왔는데 C는 벌써 7급을 달고 상임위 실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C는 거리낌 없이 국페미 씨를 아랫사람 취급했다. 성차별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전승’되고 있었다.

남존여비의 국회에서 남성이 정책 관련 업무에 집중해 경험을 쌓고 실력을 발전시켜 승진해 ‘존귀해’지는 동안, ‘비천한’ 취급을 받는 여성들은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학력과 경험을 쌓고 일을 시작했음에도 허드렛일에 갇히거나 정책 업무를 해도 상대적으로 승진이 느렸다. 대놓고 하는 성차별과 능력을 펼칠 기회의 구조적 박탈 등의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비교적 오래 일하지 못하고 국회를 떠나야 했다. 국회 보좌진으로 일을 시작하는 인턴 성비는 남녀 50:50에 가깝게 이어져 왔지만, 2019년 6월 1일 기준 국회의 여성 보좌진은 전체의 33%밖에 되지 않는다. 직급별 여성 비율은 약 ▲4급 보좌관 8% ▲5급 비서관 20% ▲6급 비서 25% ▲7급 비서 39% ▲8급 비서 60% ▲9급 비서 65% ▲인턴비서 51%이다. 전체 여성 보좌진 중 허드렛일을 독박 쓰는 ‘행정비서’ 직무가 다수인 8급 또는 9급이 43%, 인턴이 16%로 대략 열 명 중 여섯 명의 여성 보좌진이 허드렛일의 수렁에 빠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직급이 높은 여성 보좌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몇 달 전 국페미 씨는 용기를 내 A위원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신이 어떤 경험과 실력을 가졌는지 차분히 설명하고 상임위 업무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A위원장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니 안타깝지만 국회가 원래 그런 곳이다, 직무와 관련된 일은 보좌관과 상의하라고 짧게 대답했다. 허드렛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보다 차별과 소외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열변해 온 A위원장의 이중적인 태도가 국페미 씨를 더 절망하게 했다. 이런 자들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회가 과연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얼마나 진정성 있는 정책을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7시 50분, 회의실에 도시락과 회의 자료 세팅을 마치니 의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국페미 씨가 차 쟁반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최 다선 의원부터 시계방향으로 찻잔을 놓았다. D의원이 카페인이 없는 차를 달라고 했다. E의원이 아침부터 밥 먹기 부담스럽다며 과일을 달라고 해 냉장고에서 수박을 잘라 가져다줬다. 급하게 칼질을 하느라 손을 베였다. 자리에 앉아 땀이 솟은 이마를 닦고 있는데 이제야 출근한 남자 보좌관이 C와 담배를 피러 나가는 길에 국페미씨에게 다가와 말했다. “다음부턴 음료도 다양하게 놔 두고, 도시락도 간편한 걸로 몇 개 더 준비하면 좋을 것 같네요. 너무 획일적이잖아. 요즘 세상에.” 국페미 씨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수박을 자르느라 생긴 상처에서 피가 새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국페미 씨는 깨달았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허드렛일을 강제하지 않고 성별 구분 없이 공정하게 실력을 쌓아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일터, 허위와 위선 없이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있는 국회는 ‘기득권’인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국페미 씨가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일터로서 민의의 대표기관으로서 성평등한 국회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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