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추천하는 다섯 권의 책

2019.06.21
1994년 ‘한국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2005년부터 현재 명칭으로 활동해온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2019년 2월 여성 성소수자를 위한 작은 도서관 ‘사포의 서재’를 열었다. 상담소 회원이면 누구나 입장 가능하며, #레즈비언 #페미니즘 #여성운동 #퀴어운동 #인권운동 #반성폭력 #여성작가 #여성서사 등 레즈비언, 퀴어 페미니스트라면 궁금해할 만한 다양한 키워드의 책들이 꽂혀 있다. 서재에서 만날 수 있는 책 다섯 권을 소개한다.

또 다른 세상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발행)
1996년 봄부터 1999년 봄까지 발행된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전문 매거진. 레즈비언은 존재했지만 레즈비언의 목소리는 드문 시절이었고, 이성애자에게는 물론 레즈비언 당사자에게도 레즈비언에 관한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또다른 세상’ 편집진 네 명은 레즈비언들의 막연한 고립감과 외로움과 두려움을 사그라뜨리고자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매체를 선언처럼 발행한다. 레즈비언 편집장의 인사와 게이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축복 속에서 첫 호를 연 ‘또 다른 세상’은 약 3년 동안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역사에 관한 기획기사, 성정체성에 관한 자주 묻는 질문 코너, 레즈비언 부부 인터뷰,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의 포럼 기획취재, 레즈비언의 눈으로 읽어낸 정치 상황, 레즈비언 문학, 당사자 설문을 통한 레즈비언의 삶 집중조사, 레즈비언의 불평등에 관한 학술논문 등 당시에는 더 접하기 어려웠던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실었다. 지금 읽어도 시의성 넘치는 ‘또다른 세상’은 ‘사포의 서재’에서만 만날 수 있어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자료이기도 하다.

디디의 우산 (창비 발행)
‘디디의 우산’에는 중편소설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실려 있다. ‘사포의 서재’에 꼭 진열해두고 싶었던 건 ‘d’보다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이다. 현재 가장 견고한 지지를 얻고 있는 한국의 소설가 황정은이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출간 전부터 상담소 회원들과 레즈비언 독자들 입에 뜨겁게 오르내렸으니. “레즈비언의 낙인, 상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들이 남성 동성애자보다 적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덜 보였다는 뜻일까?” 같은 구절은 아프지만 반갑다. 이 책은 여자인 '나’와 여자인 ‘서수경’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상대와 함께 있으면 침묵만으로도 충분해지기까지 겪었던 외부의 느닷없는 폭력과 내부의 사나운 감정의 연대기, 또는 정의의 환희가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에도 단 한 번 말해지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던 여자들의 ‘아주 사소한’ 사랑 이야기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존재에게 이보다 더 가깝고 간절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사포의 서재’ 선정 이달(6월)의 도서.

루비프루트 정글 (큐큐 발행)
리타 메이 브라운의 자전적 성장소설. ’선정적’이지만 읽는 사람 속이 다 시원해지고, 잘난 주인공의 ‘만렙 드립력’이 빛나는, 여성 이반 커뮤니티에서 풍문으로만 떠돌던 바로 그 책, 미국발 레즈비언 성장소설이 45년여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이 책은 일곱 살 때 입양 사실을 모욕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고, 열두 살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사랑을 나누며 성정체성을 자각해나가는 여자아이 몰리의 좌충우돌 성장 모험담이다. “너란 애 정말 놀랍다. 미친 건지,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물건인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알아가는 길 끝에서 얻게 된 뜻밖의 열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삶이다. 몰리는 혐오와 미움을 자신에게 덧씌웠던 사람들에게서 사랑으로 가득찬 내면을 읽어내는 데까지 가닿는다. ‘사포의 서재’에서 이 책은 특히 각별하다. 출간되자마자 상담소에 기증하고 싶다는 메일이 여러 건 왔던 것. 출판사 관계자 분들인가 싶어서 여쭤보니 독자로서, 회원으로서, 지지자로서 ‘사포의 서재’에 선물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레즈비언 인권단체와 레즈비언 도서관과 레즈비언 문학, 그야말로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발행)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1934~1992)의 산문, 강연, 인터뷰를 묶은 책.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나의 침묵은 나를 지켜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리는 듯하다. 문장마다 힘이 넘치고 아름답고 언제까지고 현재성을 잃지 않을 것만 같은 메시지가 담긴 이 책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침묵이 용기와 언어로 터져나오는 순간을 꿈꾸게 한다. “분열을 조장하는 엉터리 말 뒤에 숨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에는 밑줄은 세번이나 긋게 된다. 물론 글의 역사적 맥락 자체는 조금 멀다. 1970년대 미국 흑인운동과 여성운동의 교차와 갈등 속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벼리며 써나간 글이니. 당시의 대의, 즉 공통의 억압이 있으니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는 명분은 흑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성적 적대감을 묵인했고,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흑인 이성애 사회의 혐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을 한다고 나서면 “당신 레즈비언 아니야?“라는 말로 낙인과 험담으로 정서적으로 고립을 당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과 그때는, 그곳과 이곳은 얼마나 다를까.) 로드의 입장은 분명하다. “나는 억압의 한 한 형태에만 맞서 싸우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성차별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이다. 이 책은 ‘사포의 서재’를 처음 방문하는 회원들에게 첫번째로 권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런 질문도 괜찮아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발행)
“동성애는 선천적인가요 후천적인가요”, “왜 ‘동성연애자’나 ‘호모’ 같은 표현을 쓰면 안 되나요”, “제가 양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모르겠어요”, “커밍아웃할 준비가 안 됐는데 엄마가 눈치를 챈 것 같아요”, “성정체성은 한번 정하면 바꿀 수 없나요”, “성정체성에 굳이 이름을 붙이거나 나눠야 하나요”, “친구가 저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건 저를 좋아한다는 뜻일까요”,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물어볼 데가 없어서요”…… 성적지향, 성정체성, 성별정체성 탐색 과정 및 눈앞에 닥친 삶을 둘러싼 성소수자 당사자의 고민, 이들 곁에 있는 이들의 궁금증 등 상담소에 도착한 사연과 문의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다. 다양한 경험들과 겹치는 질문들은 성소수자의 현실을 나타내는 바로미터가 되어주었다. 궁금했지만 물어봐도 되는 건지 주저했던 질문들,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기 어려웠던 질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 ‘이런 질문도 괜찮아요.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와 지지자가 궁금해 하는 것’이다. 2019 서울퀴어문화축제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부스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아이템 중 하나. 지금은 ‘사포의 서재’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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