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② ‘기생충’의 여자들

2019.06.11
엄밀히 말해 ‘기생충’은 기우(최우식)과 그의 아버지 기택(송강호)에 집중한 작품이다. 부자에게 클라이맥스가 할애된 만큼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덜 입체적이고 서사의 주도권도 양보한다. 하지만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주어진 역할 이상의 존재감으로 ‘기생충’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기우가 맡은 과외 학생 다혜(정지소)의 엄마 연교(조여정)부터 입주 도우미 문광(이정은)까지, ‘기생충’의 여성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늘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해냈던 사람들이다.


* ‘기생충’의 내용이 있습니다.
조여정은 원래 연기를 잘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생충’을 보고 말한다. 조여정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 미처 몰랐다고. 그런데 그는 원래 연기를 잘했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된 지 꽤 됐다. 1997년 ‘쎄씨 ’모델로 데뷔한 이래 패션지 화보 및 광고로 눈도장을 찍어온 조여정은 ‘방자전’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방자전’의 춘향은 정사 신 때문에 연기하기 까다로운 캐릭터가 아니(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고전 속 캐릭터를 출세욕과 사랑 모두를 놓지 못하는 여성으로 재해석한 춘향은 배우에게 만만찮은 캐릭터였고, 이후 조여정이 분한 인물도 어느 하나 단순하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궁중 암투를 그린 ‘후궁: 제왕의 첩’에서는 비련에 잠긴 수동적 여성이 아닌 가장 독한 최후의 생존자였다. 남편의 진급을 서포트 하며 애정 없는 부부관계를 지속하는 ‘인간중독’의 숙진은 관사 와이프 모임에서 말 한마디로 심기가 불편해지고 말 한마디로 다시 상대의 기를 꺾는 카리스마를 뽐냈다. ‘기생충’의 재벌가 사모님 연교는 집안일에 재능 없고 매사 단순하게 판단을 내리는 인물인데, 자칫 납작하게 표현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조여정은 인물에 다양한 레이어를 쌓는다. “심플한 사모님”이지만 머리가 좋고 종종 겉과 속이 다르며, 과외 면접을 보러 온 기우와 기정 남매에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 말투로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다송(정현준)의 과거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는 장면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물을 흘리는 신은 블랙코미디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후반부 전개를 위한 정확한 복선이 된다.

장혜진, 뉴페이스인데도 친근한
‘비밀보장’ 애청자들에게는 ‘김숙 친구’로 알려졌던 배우. 장혜진은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며 한때 연기를 그만둔 적도 있는, 오랜 무명 배우다. ‘기생충’에 함께 출연한 이선균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연기과 동기이고, ‘살인의 추억’으로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연기를 그만둔 상황이었기에 캐스팅이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박하사탕’ 오디션에서 떨어졌지만 그 인연으로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시’에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고, 그가 제작한 영화 ‘우리들’(윤가은 연출)의 엄마 역도 맡게 된다. 봉준호 감독이 장혜진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작품이다. ‘기생충’의 충숙은 해머던지기 선수 출신으로, 기존의 엄마 캐릭터를 묘하게 비튼다. 그는 일견 친근한 전업주부처럼 보이다가도 욱하는 남편 기택의 폭력을 가뿐히 제압하고 자식의 복수를 위해 기택보다 먼저 행동에 나서는 엄마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정보가 없던 장혜진의 백지 같은 매력은 캐릭터의 독특한 지점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기생충’ 안에서도 평소 모습과 입주 도우미로 들어갔을 때 모습이 확 다르고, 작품 밖에서의 인상 또한 확연히 구분되는 장혜진은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장점이 더 많은 배우다. 차기작 ‘니나 내나’(이동은 연출)를 포함해 그가 보여줄 얼굴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박소담이 그리는 20대의 자화
기정은 기택네 가족 중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한 유일한 캐릭터다. 하지만 ‘기생충’의 화자는 기우이며, 영화에서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역할도 그에게 보다 집중된다. 수석을 들고 문광 부부를 죽이려고 한 기우와 달리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결론을 만들어보자며 화해를 제안하려던 기정이 살아남았을 때 어떤 결론이 도출됐을지 관객은 계속 상상하게 된다. 기존 매체에서 숱하게 묘사된 청춘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영리함과 에너지를 겸비한 기정은 박소담 특유의 야무진 눈빛에서 활기를 얻고, ‘기생충’이 보여주지 않은 여백까지 채워낸다. 봉준호 감독이 ‘옥자’의 미자, 몸으로 유리문을 부수고 트럭 뒤에 매달려도 멀쩡한 소녀의 캐스팅 후보로 그를 떠올린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겠다. ‘검은 사제들’의 악령 들린 소녀 영신을 집중력 있게 연기하며 눈도장을 찍은 박소담은 일찍 연기력으로 주목받은 배우가 흔히들 맞닥뜨리는 슬럼프도 씩씩하게 헤쳐나간 케이스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촬영 당시 매니저도 없이 촬영장에 나가며 배우로서의 가치관을 재정립했다는 박소담의 면면은 지금 20대 청춘이 갖고 있지만, 간과되기 쉬운 속성이다. 청년은 불안하고 의기소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쉽게 지지 않는 강단도 있다는 것을, 박소담은 ‘기생충’에서 찬란히 보여줬다.

정지소, 커다란 눈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KBS ‘TV 소설 삼생이’의 삼생의 어린 시절이나 투니버스 ‘막이래쇼: 무작정탐험대 시즌4’ 등으로 얼굴을 알린 아역배우. 당시에는 현승민으로 불리었지만, 지금은 정지소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기생충’에서의 모습이 그에게 새로운 시작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다혜는 ‘기생충’에서 은폐된 감정이 가장 많은 캐릭터다. 애정결핍을 느끼는 그가 과외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말고 다른 욕망은 없는지, 기우가 몰래 읽은 일기장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다송의 생일파티 날 벌어진 비극 이후 다혜는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영화는 모두 생략하고 있다. 외모만 놓고 보면 ‘플란다스의 개’의 배두나, ‘괴물’과 ‘설국열차’의 고아성, ‘옥자’의 안서현이 떠오르는 정지소의 커다란 눈이 품을 수 있는 감정은 분명 이들 캐릭터만큼 풍성할 수 있다. 성인이 된 후 ‘기생충’으로 복귀한 정지소의 행보를 눈여겨볼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은 이정은의 시대
얼굴은 익숙하지만 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는 배우. 근 10년간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해온 이정은은 그런 배우였다. 하지만 tvN ‘오 나의 귀신님’의 서빙고 보살부터 tvN ‘미스터 선샤인’의 함안댁까지, 이정은은 자신의 캐릭터를 반드시 시청자가 인지하게 만들었다. 특히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언어 능력이다. 어떤 사투리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대사 한마디만 쳐도 귀에 쏙 박히며, 어느 시대에 데려다 놓아도 이정은이 하는 말에는 현실감이 있었다. 심지어 ‘옥자’의 타이틀롤, 옥자의 목소리 연기를 했을 때도 그는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시청자에게 봄비처럼 스며든 이정은의 존재감은 올해 백상예술대상이 JTBC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한지민)의 엄마를 연기한 그를 여우조연상에 호명하게 하는 발판이 됐다. 과거 중년 남성 배우들에게 주로 붙던 ‘명품 조연’이나 ‘흥행 요정’ 같은 수식어가 최근엔 이정은의 몫이 됐다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

봉준호 감독은 이 같은 이정은의 잠재력을 진작에 알아본 연출자 중 하나다. 이정은이 출연한 뮤지컬 ‘빨래’의 제작사 대표이기도 한 ‘마더’의 최세연 의상 감독이 오작교가 돼 오디션을 보게 된 그는 ‘마더’에서 죽은 고등학생의 유가족으로 잠깐 얼굴을 비출 기회를 얻었고, ‘옥자’에서는 목소리 연기뿐만 아니라 명동 지하상가 장면에서 잠깐 출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 시나리오를 쓸 당시부터 이정은을 떠올리며 문광 캐릭터를 구체화해나갔다. 박 사장(이선균)네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결코 입주 도우미처럼 보이지 않는 첫인상을 가진 그는 공간에 가장 흡수된 존재다. 개 산책을 시키고 오는 장면에서는 키득키득 웃게 만들다가, 특정 장면에서는 아예 영화의 장르를 바꿔 버리는 그는 ‘기생충’의 공기를 좌지우지하는 괴력을 가졌다. ‘기생충’ 직전에는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에서 외도를 들킨 후 지방으로 도피한 대원(김윤석)에게 주차비를 강탈하는, 동네의 일진 같은 인물로 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눈이 부시게’, ‘미성년’, ‘기생충’으로 3연타를 날린 그가 올해 가장 유력한 여우조연상 후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그에게 좀 더 긴 시간이 할애되고, 이정은의 주연작을 만나볼 기회가 등장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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