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들’, 다시 만난 세계

2019.06.10
MBC ‘가시나들’은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가시나들’ 3회에서 소개된 박무순 씨의 사연은 72세부터 85세까지의 다섯 할머니들이 한글을 이제야 배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잘 설명해준다. "어릴 때 마을에 한글 알려주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찾아갔는데 ‘가시나가 글은 배워서 뭐할라꼬’라며 쫓아냈습니다. 처음 지하철이 생겼을 때도 글을 모르니 하루 종일 지하철만 타다가 파출소에 갔습니다. 아이들 책가방 챙길 때도 눈치로 어림잡아서 골라주는 게 속상했습니다. 다 늙어서 배우면 어따 쓰겠냐고 하는 데 나는 모르고 살기가 서러웠습니다’. 이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더는 서럽지 않기 위해 한글을 배운다.

한평생 웅양댁이나 서울댁, 아니면 어머님이라고 불리던 할머니들은 학교에서만큼은 누구 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남순 씨의 집에는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한글을 공부한 흔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소판순 씨는 서울에 간 짝꿍 최유정을 그리워하며 그의 이름을 종이에 빼곡하게 적기도 했다. 수업 중 김춘수의 시 ‘꽃’을 낭송하고 그 의미를 묻는 선생 문소리의 질문에 김점금 씨는 별다른 설명 없이 자신의 짝꿍 장동윤의 이름을 외쳤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의 의미를, 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것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그 의미를 새삼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던 삶. ‘가시나들’은 할머니들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통해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대에게 보여준다. 이들은 수업 시간에 속담을 배우면서 툭하면 밥상을 엎고 숟가락을 내던지던 남편들을 떠올리거나, 개사한 유행가를 흥겹게 부르다가도 ‘결혼은 고생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좀 더 사적인 가정방문 시간에는 학교를 가고 싶어도 딸래미는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너무 배가 고파 벽지를 뜯어먹던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린 시대를 잘못 타고났거든”이라는 박무순 씨의 말처럼 이들은 부당함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불행한 시대 속에서도 가장 약자였던, 온통 빼앗기기만 했던 할머니들은 그래서 박탈감이 주는 상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 김점금 씨는 촬영하느라 서있는 제작진을 기어코 저녁상에 불러 앉힌다. 이남순 씨는 제작진 한명 한명에게 빠짐없이 음료수를 건네며 "누구는 잡숫고 누구는 안 잡숫고 하면 안돼"라고 힘주어 말한다.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 누구도 서럽지 않게,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현재 할머니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박무순 씨는 글 모르는 것을 숨기고 싶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던 이남순 씨를 몇 년간 설득해 지금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다. 50년간 이웃이었던 김점금 씨와 박승자 씨는 남편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가시나들’은 이러한 연대가 할머니들뿐 아니라 다른 세대까지 넓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대 연예인 짝꿍들은 얼핏 일방적으로 할머니들을 돌봐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한국말이 서툰 우기는 오히려 박승자 씨에게 한글을 배우고, 대신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준다. 이브와 수빈은 이남순 씨와 박무순 씨를 졸졸 따라다니며 산에서 진달래꽃을 따먹는 등 시골 생활에 대해 하나 둘 배워간다. 최유정이 소판순 씨에게 박막례 할머니 동영상을 보여주고 이를 함께 따라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나이 든 세대는 자신들이 살아오며 체화한 경험을 알려주고, 젊은 세대는 이들에게 미처 몰랐던 세상의 변화를 알려준다. 서로 다른 세대가 단절되지 않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시나들’의 연출을 맡은 권성민 PD는 “다큐멘터리가 어떤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노력한다면, 예능은 그 삶에 새로운 변화를 더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그리는 장르”라고 밝힌 바 있다(‘스포츠동아’). 그의 말처럼 한글을 배우던 할머니들의 일상에 낯선 청년들이 나타났고, 이 만남은 서로를 변화시켰다. 지난 9일 방송된 ‘가시나들’의 마지막 수업은 편지 쓰기였다.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는 말에 할머니들은 먼저 간 영감, 귀한 손주, 사랑하는 딸에게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짝꿍들은 대부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그중에는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을 응원할게’, ‘엄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물어보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내용도 있었다. 나이 든 세대가 포기하지 않고 배우는 동안, 젊은 세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다른 세대를 좀 더 이해하게 됐다. 다시, 모두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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