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엔드게임│③ 번역을 점검하다

2019.04.30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자칫 ’어벤져스: 가망 없어’가 될 뻔했다. 전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 당시 치명적인 오역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번역은 어땠을까. 번역된 자막이 영화의 감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를 고려해 몇 개의 예를 소개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중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할 것.

캐릭터의 관계를 일그러트리는, 섬세하지 못한 번역
영화 초반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물자가 떨어진 우주선에 갇혀 우주를 표류하며 연인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에게 유언을 남긴다. 22일 동안의 근황을 전하며 전작에서 입었던 치명상을 네뷸라(카렌 길런)가 치료해주었다고 설명하는데, 이때 네뷸라가 우주 기술을 활용해 훌륭한 솜씨를 보여줬다는 의미로 “Practical”이라는 단어를 썼다. 네뷸라는 전투력과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전신을 기계로 개조당한 만큼 기술과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다. 극장 자막은 이 대사를 “쓸모가 많아”라고 번역했다. 이것만 보면 토니의 위트있는 입담을 살린 번역이라고도 평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 동일한 번역이 반복되어 쓰였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영웅들은 사라진 사람들을 되살릴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이때 두 명의 네뷸라가 동시간대에 존재하게 되면서 전뇌 네트워크를 공유해 갈등을 빚는다. 과거의 네뷸라는 타노스에게 평생 학대받아 일그러진 성격을 갖게 된 악역이다. 현재의 네뷸라는 자신을 끊임없이 이용하려고만 하는 타노스에게 인정받으려는 헛된 노력을 그만두고 언니 가모라와의 관계를 회복해 선한 마음을 갖게 된 선역이다. 두 명의 네뷸라가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들은 그가 갖고 있는 학대 자녀로서의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적 분노를 묘사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장면을 “쓸모”라는 동일한 자막으로 함께 묶어버리면 자칫 토니 스타크가 네뷸라를 동료이자 인격체로 존중하는 게 아니라, 타노스가 그랬듯 소모품 따위로 낮잡아 보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 토니와 네뷸라가 표류중인 우주선에서 단란하게 게임을 하고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보면 사실 둘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캐릭터의 성격과 맞지 않을뿐더러 의미가 바뀐 번역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을 제거하여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5년이 흘렀다. 타노스의 핑거스냅은 모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다.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상담치료 모임을 통해 사람들에게 상처와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계속 나아가라고 독려해준다. 이때 마지막 대사 “Thanos should’ve killed all of us”는 ‘떠나간 절반의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남은 절반인 우리는 주어진 삶의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살아있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타노스의 손에 절멸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다. 전작에서 “we don’t trade lives”"라고 하며 마인드 스톤을 무작정 파괴하기보다 우선적으로 동료인 비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주장하던 영웅, 스티브 로저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더욱 강인한 의지의 표명이다. 반면 영화의 자막은 뜬금없는 추측성 발언으로 처리했다. 마치 어벤져스 일행이 타노스를 막기 위해 노력을 한 덕분에 절반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타노스의 계획은 애초부터 절반만을 죽이는 것이었다. 명백한 오역이다.

캐릭터의 심묘사를 충분히 담지 못한 번역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어벤져스 원년 멤버 중에서 가장 어두운 과거를 지닌 캐릭터다. 소련의 암살자 육성 프로그램 ‘레드 룸’ 출신의 그는 오랫동안 살아있는 무기로 살면서 국가 안보에 위협을 끼친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소련 KGB를 나와 쉴드에 합류하여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 되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합을 맞춘 끝에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진정한 친구로 거듭난 스티브 로저스와의 대화에서 나타샤는 자신의 속마음을 밝힌다. 이때 나타샤는 어느새 단순한 직장을 넘어 소중한 가족이 되어준 어벤져스 덕분에 자신은 더 나은(better) 사람이 됐으며, 지금도 보다 더 나은(better)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고백한다. 극장 자막은 나타샤가 두 번 반복한 “better”를 살리지 않고 “달라졌다”라고 의역했는데, 이는 ‘악’에서 ‘선’으로 전향한 자로서의 죄의식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번역이다. 나타샤는 어벤져스를 만나 과거보다는 “더 나은(better)”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best”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놓치게 되면 영화 후반부에 나타샤가 끝끝내 클린트 바튼(제레미 레너)을 대신해 목숨을 희생한 선택에 대한 최소한의 개연성이 사라지게 된다. 클린트는 나타샤를 쉴드에 영입시킨 장본인으로 나타샤가 ‘악’에서 ‘선’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사람이다. 하지만 현재 클린트는 가족을 잃은 분노에 눈이 멀어 무차별적으로 악인을 죽이는 다크히어로가 된 상태다. 과거 자신을 ‘선’으로 인도해주었으나 이제는 ‘악’에 가깝게 타락해 버린 친구의 모습 속에서 나타샤는 거울을 보듯이 KGB시절 과거의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클린트를 살려야만 했다. 다시금 친구를 ‘선’의 축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타샤 본인이 지금보다도 “더 나은(better)” 사람이 되기 위해서.
 
캐릭터의 의견을 곡해하는 번역
‘앤트맨과 와스프’ 쿠키영상에서 앤트맨 스콧 랭(폴 러드)은 양자영역에 들어갔다가 그 직후 그를 꺼내줄 멤버들이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사라지면서 5년간 그 안에 갇히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양자영역에서 실제로 그가 체감했던 시간은 고작 5시간. 스콧 랭은 어벤져스를 찾아가 난해한 양자영역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은 사람들을 되살릴 수 있다며 희망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navigate”인데 이는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항해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 핌 수트를 입고 과거로 향하는 장면에서 캐릭터들의 1인칭 시야를 보여준다. 이때 헬멧 렌즈에 “시간의 소용돌이”의 수많은 갈래들 중에 올바른 경로를 찾아 길을 안내하는 프로그램이 화면에 나타난다. 스콧 랭이 처음 제안한 것처럼 ‘양자영역 네비게이션’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극장 자막에서는 “조종하다”라고 오역했는데, 이대로라면 스콧 랭은 양자영역이라는 마이크로 유니버스 전체를 입맛대로 주물러보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캐릭터의 말투를 살리지 못한 여성혐오적인 번역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반전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토르의 변화일 것이다. 전작에서 강력한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내어 타노스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전사는 5년이 지난 뒤 타노스의 목을 제때 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패배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어벤져스 멤버들은 과거에서 인피니티 스톤을 가져오기에 앞서 스톤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브리핑을 진행하는데, 토르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만취한 상태로 리얼리티 스톤으로 분류되는 물질 ‘에테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크린에 옛 연인 제인 포스터의 사진이 떠오르자 그는 곧 감상에 젖는다. 그의 발언 중 “Old flame”은 옛 연인을 칭하는 고상한 어투의 말인데, 특히나 지금까지도 긍정적이고 애틋한 감정이 남아있는 사람을 칭할 때가 많다. 헌데 극장 자막은 이를 “내 연인이었던 여자인데”라고 옮겼다. 아무리 만취 상태의 토르라고는 하지만 토니 스타크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적’인 말투를 구사하는 천둥의 신이 과연 이렇게 투박하고 직설적인 말을 공공연하게 할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토르의 입을 통해 제인 포스터를 단순히 ‘토르의 연인’이라고만 단정짓는 것이 적절한가. 제인 포스터는 노벨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유망한 천문학자이며 그의 과학적 재능이 없었다면 토르는 숱한 위기를 극복해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 캐릭터를 서술함에 있어 여성 개인의 삶보다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여성을 남성의 액세서리로 취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가 모호하고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오역
양자터널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 가모라(조 샐다나)는 피터 퀼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다. 이 가모라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에서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파워 스톤이라는 무기를 로난에게 넘기지 않게 하기 위해, 나아가 미치광이 타노스에게서 우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첫편에서 가모라가 추억의 노래를 통해 구애하려던 피터 퀼의 목에 칼을 겨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례하게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그를 무릎차기로 응징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가모라가 피터 퀼을 사랑하게 된 건 그의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씨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이었으므로, 과거의 가모라가 미래의 본인의 선택에 대해 실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때 가모라의 사정을 알고 있는 네뷸라가 “The choice was him or tree”라고 해명하는데, 이때 번역이 문제다. 네뷸라의 의중은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남자가 피터 퀼이었다는 뜻인데, 자막만 보자면 마치 가모라가 피터 퀼 말고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처럼 전달될 수도 있다.

일반 대중을 고려하지 않은 발음 표기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은 오랜 세월 동안 팬층이 두텁게 형성된 만큼 극장 자막의 정확성에 대해 비판이 있어 왔다. 개중에 뜨거운 감자처럼 꾸준히 언급되는 논제로 ‘열성 팬들을 위해 번역할 것이냐, 일반 대중을 위해 번역할 것이냐’가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여는 캡틴 아메리카의 구호 “Avengers... Assemble”이 이 문제에 직결되는 대사다. 이 구호는 원작 코믹스에서 어벤저스의 상징과도 같은 캐치프레이즈로, 주로 전투에 돌입하는 상황에서 팀의 리더(캡틴 아메리카 말고도 많은 인물들이 돌아가며 리더 자리를 맡았다)가 외치는 대사다. 마블의 팬들은 어벤져스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이 구호가 나오길 애타게 기다려왔고 실제로 원년 멤버의 마지막 영화인 ‘엔드게임’에서야말로 반드시 구호가 나올 것이라는 외신 기사가 쏟아졌을 정도다. 영화 또한 기대에 부응해 구호 사이에 한 호흡을 넣어 극적인 효과를 한껏 부여했다. 하지만 미국에 비해 원작 코믹스의 팬층이 적을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일반 대중이 모두 그런 사정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마블 영화는 반드시 팬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시원한 액션, 거대한 스펙타클, 유쾌한 유머를 제공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따라서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층을 위해 발음 그대로 표기하기보다 적절하게 한국어 번역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캐릭의 성격과 극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실패한 번역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스콧 랭이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기에 어벤져스는 여러 분야에 명석한 토니 스타크를 찾아간다. 그는 5년 동안 페퍼 포츠와 결혼하고 딸아이 모건도 낳아 안정적으로 정착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실현 가능성도 희박한데다 만고 끝에 찾아낸 평화를 깨트릴 수 있는 위험한 길을 거부한다. 토니가 “그러니까 지금 제안하려고 하는 게 뭐야, 뭐라고 부를 건데?”라고 물었을 때 스콧이 쓴 표현으로 “Time heist”가 있다. ‘불가능한 일,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치부되는 ‘시간 여행(Time travel)’을 피하기 위해 전직 좀도둑다운 단어 선택을 보여준 것인데, 극장 자막은 이를 “시간 강탈”이라고 번역했다. 일단 어벤져스 멤버들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스톤들을 강제로 빼앗긴 하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시간 강탈이라는 말을 들으면 도대체 누구한테 시간을 빼앗는다는 것인지, 재빨리 감이 오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오션스 시리즈’와 같이 무언가를 훔치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려내는 영화 장르를 ‘하이스트(heist) 영화’라고 부르는 만큼, 스콧의 이 대사는 관객들에게 앞으로의 유쾌한 전개를 예고하는 기능도 함께한다. 따라서 ‘시간 여행’이라는 단어를 살짝 비틀고 국내 하이스트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작전’이라는 단어를 써서 ‘시간 역행 작전’이라는 번역은 어떤지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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