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말 얹는 남자들

2019.04.29
“나는 오지라퍼다. 굉장한 오지라퍼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한민국이 어쩌고’ 하며 말하고 있다.” 지난 3월23일 종영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배우 유아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후회스럽기도 하겠지만 명쾌한 정답이라는 게 없는 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 보아야 한다고. 그의 말처럼 유아인은 오지라퍼다. 그는 언행을 삼가는 대다수의 연예인들에 비해 거침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미디어는 그와 같은 오지라퍼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트렌디한 이슈의 플로우에 말을 얹어줄 누군가가 늘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각종 공적인 행사에서 유아인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어떤 면모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오지라퍼, 또는 인플루언서들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개운치 않은 마음이 든다.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불편한 감정을 상기하던 중 유아인이 도올 김용옥과 함께 진행을 맡은 ‘도올아인 오방간다’의 한 대목에 이르게 됐다. ‘대한민국은 평등한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여성 방청객이 김용옥과 유아인에게 물었다. 영업직 사원이 되고 싶은 그는 자기소개서를 200번 쓰고 100번 정도 면접을 보아도 늘 "여자인데 왜 영업을 하려고 하냐"라는 사회의 편견에 부딪힌다고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이 사회가 ‘헬조선’이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올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 여성들이 불합리하게 억압받던 상황에 비하면 지금 꾸준히 좋아지고 있다”라고.

도올의 답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적절치 않았다. 첫째로 그는 이 사회가 여성에게 불평등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방청객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둘째로 그는 이 사회가 ‘헬조선’이라고 느낀다는 여성의 감정을, 과거보다 훨씬 나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나이브한 불만 표출로 축소시킴으로써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낄 법한 여성들이 입을 열 기회를 차단시켰다. 하지만 그 자리에 도올의 불충분한 답변을 보완해줄 사람은 없었다. “약자의 편에서 말씀드려봐도 되냐”라며 성차별이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유아인은 여성들이 서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탈길을 지웠다.

이런 일은 ‘도올아인 오방간다’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를 향해 발언할 권리를 공적으로 부여받은 사람들이 특정 성별에 치우쳐 있으며, 그들이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고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성별의 이야기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늘어놓는 경우 말이다. 레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런 현상은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으며, 이런 현상 때문에 거의 모든 여자들은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을 매일 치르고 있다.

지금 시점에 새삼 ‘맨스플레인’에 대한 논의를 다시 꺼내려는 건 아니다. 다만 세상의 절반에 달하는 존재들이 스스로에 대해 발언하고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권리를 박탈당하는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tvN ‘알쓸신잡’ 시즌3의 유일한 여성 게스트였던 김진애 박사는 지적인 콘텐츠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여성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여성들을 보며 SNS에서 한마디 보탰던 일화가 섭외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여성 패널을 섭외할 일인가 싶긴 하지만(그마저도 단 한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변화는 김진애 박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패널의 부재에 대한 말을 얹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연 배우 브리 라슨이 스스로 “거대한 페미니즘 영화”라 불렀던 슈퍼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의 GV(관객과의 대화)를 오직 남성 인플루엔서에게만 맡긴 영화 수입사, ‘가모장’ 캐릭터로 이름을 알린 김숙을 초청해 그가 여성 예능인으로서의 고충을 이야기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를 제외한 모든 패널을 남성으로 섭외한 KBS ‘대화의 희열’ 제작진의 사례처럼 누군가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각성도 절실해보인다. 각종 사안에 빠지지 않고 말을 얹는 남자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이제는 여성 버전의 ‘대한민국이 어쩌고…’를 들어보고 싶다. 그 여성들이 협박과 희롱에 시달리지 않으며 안전하게 말을 얹을 수 있는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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