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링 위의 여성

2019.04.18
2019년 4월 7일에 열린 프로레슬링 단체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의 가장 큰 연례 행사, ’레슬매니아 35’의 메인 이벤트는 35년 만에 최초로 여성들의 경기로 치러졌다. 최근 팬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베키 ‘더 맨’ 린치가, 여성 UFC 챔피언 출신으로 WWE에 이적해 WWE의 세부 브랜드인 ‘러(Raw)'의 여성 챔피언이 된 론다 ‘라우디’ 로우지와 전설적인 레슬러 릭 플레어의 딸이자 WWE의 세부 브랜드 ‘스맥 다운’의 여성 챔피언 샬롯 ‘더 퀸’ 플레어를 꺾고 통합 챔피언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 불만을 표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엄연히 프로레슬링이 남성의 경기고 메인 이벤트는 가장 중요한 경기인데, 어디까지나 눈요기에 불과한 여성부에게 할당한 것은 “아동 등급”, “PC운동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85년 3월 31일, '레슬매니아 1'에서는 여성부 경기가 세미 파이널로 치루어졌다. 이 경기는 팝 스타이자 LGBT 활동가 신디 로퍼가 프로레슬링 매니저 ‘캡틴’ 루 알바노의 개성에 반해 ‘Girl Just Want to Have Fun’ 뮤직비디오에 출연시킨 일이 계기가 되어 진행된 ‘락 앤 레슬 커넥션’(1983-1987) 스토리라인의 절정이었고, 락 앤 레슬 커넥션 덕분에 WWE(당시 WWF)가 미국 대중에게 인지되었다. 여성 프로레슬링은 분명 스스로를 증명해왔다.

여성 프로레슬링은 분명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팬을 얻어왔음에도, 프로레슬링 업계는 오랫동안 여성 프로레슬링을 차별하고, 착취해왔다. 본래 프로레슬링은 서커스의 쇼로 시작했다. 여성과 왜소증 레슬러는 사이드쇼나 프릭쇼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오랫동안 여성 선수의 경기는 한 수 아래 취급을 받거나 남성 선수의 보조 역할을 하는 발레(Valet)만 허락됐다. 심지어는 매춘을 강요받고 성적인 학대, 강간을 당하기까지 했다.

WWE도 오랜동안 여성부에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초맨’ 랜디 새비지의 매니저로 알려진 센세이셔널 ‘퀸’ 셰리도 본래는 1987년 NWA 여성 챔피언에 오른 셰리 마텔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 여성부가 축소되어 매니저로 전향한 것이다. 이른바 ‘애티튜드’ 시대(1997-2002)와 ‘루쓸리스 어그리션’(2002-2008) 시대 동안, WWE는 여성 선수의 명칭을 ‘디바'로 완전히 바꾸었고, 미인대회 출신의 모델이었던 세이블을 비롯해 경기 능력이 전무한 모델 출신을 선수로 기용해 발레나 매니저 역할을 주로 맡겼다. 속옷 차림으로 만들면 이기는 ‘브라 앤드 팬티’, 란제리 차림으로 벌어지는 ‘베개 싸움’ 같은 형식의 경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저항은 계속 되었다. 2000년에 데뷔한 트리쉬 스트라터스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파멜라 앤더슨을 닮은 외모로 인해 성적인 요소를 담은 스토리라인에 기용되었으나, 실력을 증명해 또 다른 실력파 선수인 리타와 함께 챔피언에 올랐고, 2006년 ‘레슬매니아 22’에서는 미키 제임스와 여성부 역대 최고의 경기라 꼽히는 명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결국 많은 여성 선수가 단체를 떠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WWE가 어린이와 여성도 부담 없이 그들의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하려고 한 ‘PG 시대(2008-2013)’부터 WWE는 디바스 챔피언십을 만들고 새로운 여성부 선수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다시 레슬러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육성된 팬의 적극적인 SNS 활동을 통해 ‘더 리얼리티’ 시대(2014-2016)가 열렸다. 2015년에는 해쉬태그로 ‘#GiveDivasAChance’ 운동이 벌어졌고, 2016년 ‘레슬매니아32’를 통해 정식으로 ‘디바’라는 명칭이 폐지되었다. 2017년부터는 단체 소속에 관계없이 참가 가능한 '매 영 클래식 토너먼트’가 시작되었고, 2018년에는 남성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로얄럼블’(여러 명의 선수들이 순서대로 들어와 마지막까지 링에서 쫓겨나지 않은 단 한 명의 선수가 우승하는 경기) , ‘일리미네이션 챔버’(링에서 대기하는 여섯 명의 선수중 두 명의 선수로 경기를 시작, 다른 선수들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참여해 한 명이 남을 때까지 하는 경기) 형식의 경기가 열렸다. 또한 여성만이 출전하는 유료 시청 이벤트인 ‘에볼루션'도 열렸다.

이번 메인 이벤트 경기에서 본래는 잡히지 않아야 할 음성이 잡혔다. 론다 로우지가 두 선수의 합동 파워봄 공격을 연속으로 받으면서, 지친 두 선수를 격려하며 속삭인 말이다. “One more, you can do it. I believe in you guys.” (한 번 더. 할 수 있어, 난 너희를 믿어.) 나 또한 믿는다. 오랫동안 여성혐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던 WWE에서 일어난 큰 변화지만, 끝이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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