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리티

루피타 뇽의 목소리

2019.04.10
*영화 ‘어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어스’에서 루피타 뇽이 연기한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은 외양을 가진 존재 레드에게 묻는다. 우리와 같은 모습의 당신들은 대체 누구냐고. 레드는 대답한다. “우리는 미국인이다.” 우리는 누구이고, 누가 미국인이며, 미국인이란 또 어떤 존재인지를 한 번에 묻는 그 장면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 중 하나다. 이 장면을 멕시코에서 태어난 케냐인 배우 루피타 뇽이 연기하면서, 겹겹의 질문 위에 또 하나의 결이 생긴다. 루피타 뇽이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미국에서 지금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장벽을 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캐스팅은 조던 필 감독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물론 루피타 뇽이 훌륭한 연기자이기 때문에 캐스팅을 한 것이 진실이겠지만.

루피타 뇽은 2013년 ‘노예 12년’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작품으로 2014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만 30살의 나이에 영화 데뷔와 아카데미 수상을 한번에 경험한 뒤에도 루피타 뇽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후 실사판 ‘정글북’에는 목소리로 출연했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와 이어지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션 캡처로 독특한 안경을 쓴 할머니 해적 마즈 카나타를 연기했다. ‘블랙팬서’에 이르러서야, 다시 스크린을 통해 움직이고 말하는 루피타 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블랙팬서’의 나키아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과 편견에 반대하고, 할리우드의 외국인 여성 배우로서 목소리를 내 온 루피타 뇽과 떨어뜨려서 볼 수 없는 캐릭터다. 와칸다의 문호를 개방해서 아프리카 전체를 돕고 난민을 받아들이자는 열린 정책을 주장하며 실천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루피타 뇽은 슈퍼 히어로 세계관 안에서도 뚜렷하게 자기 자신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존재할 수 있었다. '어스'에서 다시 주연을 맡은 루피타 뇽은 ‘노예 12년’에서 보여줬던 그 잠재력을 다시 한 번 드러낸다. 인종과 계급, 사회 문제를 한 편의 작품에 녹여내려는 조던 필 감독의 야심은, 양 극단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듯하다가 그 둘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루피타 뇽의 연기로 완성된다. 언제나 천천히 자기만의 빛을 내던 루피타 뇽이 두 배로 빛나는 순간이다.

얼마 전 루피타 뇽은 개인 SNS를 통해 자신이 쓴 동화책 ‘Sulwe’를 공개하며 “이 책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가진 피부색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을 때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이 황금 트로피를 보며, 저는 모든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든, 그 꿈은 유효하다는 것을요.” 할리우드 미투의 시발점이 된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자신 또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음을 고발한 뉴욕 타임즈 기고문에서 루피타 뇽은 “침묵의 공모를 끝내는 데 기여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매일 밤 피부가 밝아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잠들었던 어린 소녀는, 이제 그 기도를 넘어서 자신의 꿈을 이루며, 그 꿈과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니 루피타 뇽이 계속 말하고 연기하면서 거기, 할리우드 산업의 한복판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분명히 세상의 일부는 밝아질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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