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과 밈│① 너희는 내게 사딸라를 줬어

2019.04.09
김영철은 지금 세상이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과거 연기한 KBS ‘태조왕건’의 궁예, SBS ‘야인시대’의 김두한, 영화 ‘달콤한 인생’의 조폭 보스 강사장은 모두 위압적인 카리스마를 내세웠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에서 궁예는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노래를 부르고, 김두한은 무슨 상황에서든 ‘사딸라’를 외치는 ‘사딸라 아저씨’가 됐다. ‘달콤한 인생’의 명대사인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대사는 수많은 상황에서 써먹기 좋은 ‘드립’으로 사용된다. 김영철이 진지하게 임한 연기가 맥락이 없어진 채 온갖 방식으로 변형된 밈으로 인터넷에 퍼져 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유튜브에서 ‘궁예’를 검색하면 2015년에도 ‘태조왕건’을 다른 작품의 음성과 합성한 영상이 나온다. 그 결과 김영철은 원작의 궁예, 김두한, 강사장이 아닌 밈 속에서 코믹하게 소비되는 캐릭터로 CF를 찍었다. 그가 지난 3월 14일 출연한 SBS ‘가로채널’은 그에게 “짤방 역주행 스타”라는 자막을 달았다. 손창민이 MBC ‘신돈’에서 보여준 연기나 보이그룹 신화의 전진이 솔로로 발표한 노래가 김영철을 이용한 밈과 비슷한 방식으로 퍼졌을 때는 단기간의 화젯거리였다. 반면 김영철을 소재로 한 밈은 몇 년동안 인터넷에 퍼져나간 끝에, 50년 가깝게 연기를 해온 배우에게 새로운 활동을 가능케 한다.

공교롭게도 김영철과 동명이인의 예능인은 오랫동안 특정 배우나 가수의 성대모사를 자주 했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도 김준호가 KBS ‘개그콘서트’ 등을 통해 선보이며 퍼져나갔다. 권혁수는 밈으로 돌던 나문희의 ‘호박 고구마’를 tvN ‘SNL 코리아’에서 성대모사를 하면서 CF를 찍기도 했다. ‘SNL 코리아’ 자체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여러 콘텐츠들을 TV로 옮겨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TV 리모컨에 손이 가기 전에 스마트폰의 유튜브를 먼저 찾고,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이 온갖 SNS를 타고 퍼지는 시대에 대중과 광고 회사가 굳이 원본이 아닌 성대모사를 하는 예능인을 찾을 필요는 점점 줄어든다. 신봉선은 MBC ‘복면가왕’에서 놀라는 표정을 지은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광고 계약을 했다. 밈으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각종 영상, 사진, 음성, ‘드립’ 등은 더 이상 중간의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영향을 준다. 당사자도 잊은 어떤 순간이 밈으로 돌아와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 수 있다.

밈은 김영철에게 여기서 그가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또다른 방식의 기회를 준다. 김영철이 진행하는 KBS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서, 10대 학생들은 그를 보고 “사딸라 아저씨”라고 말한다. 이에 김영철은 웃으면서 그들에게 인사하고, 그가 태연하게 “이곳에는 엄마 아빠 대를 이어 동문이 된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학생들은 ‘야인시대'가 아닌 밈을 통해 김영철을 알고, 김영철은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궁예와 김두한을 연기한, 방송에서조차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는 배우에게서 10대에게 친절한, 매너 좋은 노인의 모습이 나온다. 김영철의 밈은 그가 CF에서 궁예, 김두한, 강사장의 캐릭터를 희화화해서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기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었던 매력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서의 영상 역시 인터넷으로 해당 부분만 편집 돼 퍼지면서 화제가 됐다. 원본을 대중이 마음대로 비튼 밈이 인터넷을 한바퀴 돌자 원본에 해당하는 배우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밈의 영향력을 따라간다. 밈이 부분적으로 미디어가 된 시대의 풍경이다.

2000년대 초 발표된 ‘태조왕건’과 ‘야인시대’가 인터넷에서 재발굴 된 것은 100여 개의 케이블 TV 채널 중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재방송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삐놈’ 시절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위주로 퍼지던 밈은 유튜브 등 SNS의 등장과 함께 갈수록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진다. 이 변화의 시간 동안 ‘관심법’이라는 자신의 감만으로 신하를 죽이는 궁예, 막무가내로 ‘사딸라’만 외치던 김두한의 모습은 작품 전체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와 별개로 놀리기 좋은 대상이 됐다. 그 사이 김보성이 주먹을 꽉 쥔 채 ‘의리’를 외치며 터프가이의 모습을 강조하던 것이 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막무가내로 남성성을 강조하는 캐릭터가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밈은 그것들을 온갖 방식으로 놀릴 수 있는 수단이 됐다. 반면 19년 전 궁예로 KBS ‘연기대상’ 대상을 받은 배우는 자신의 연기 경력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캐릭터가 희화화 되는 것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회 삼아 과거와는 또다른 자신을 보여준다. ‘가로채널'에서 그는 강호동과 양세형을 후배로 생각하고 말을 놓는다. 반면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서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존대를 하며 예의를 지킨다. 선후배 관계를 중요하게 따지던 연예계의 관습은 남아있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일반인에게는 적절한 매너를 지킬 줄 안다. 그는 ‘가로채널’에서 자신 위주로 촬영 시간을 맞추던 것을 이순재의 행동을 보며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바르게 걷고, 찾아간 동네 식당에서 밥을 사먹으면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하며, 말솜씨는 부족하더라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최대한 예의있고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노인 남성.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문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풍경을 바꿔놓는 사이, 누군가는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변한다. 그리고 김영철은 ‘가로채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냐? 그렇게 (시청률이) 부러졌는데 지금 살아 남은 건 4딸라야.” 누군가 해온 활동들은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돌아왔을 때, 현재의 자신이 밈 속의 자신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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