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여성들│② 혜원, 여왕과 두 여자, 다프네, 한시현, ‘뺑반'의 여자들

2019.03.19
최근 한국 영화 산업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여성 배우들의 활약이다. ‘허스토리’, ’미쓰백’, ‘국가 부도의 날’, ‘항거: 유관순 이야기’처럼 여성 주연의 영화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고, 헐리웃의 경우 8명의 주연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오션스 8’을 비롯해 마블의 첫 여성 히어로물인 ‘캡틴 마블’ 같은 영화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만큼 여성 배우들이 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그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들도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여성 배우들의 출연작이 늘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이 여성의 삶을 얼마나 다양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며, 알릴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인상적인 캐릭터들과 함께 짚어보았다.

* 항목별로 다루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 혜원, 독립적인 여성의 필요충분조건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은 독립적이지만 고립되지 않는 여성이다. 배고픈 도시의 획일화된 삶에 지친 혜원은 자기만의 작은 숲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지붕 수리부터 요리까지 자급자족하며 해박한 지식을 뽐내는 혜원에게 남의 도움은 필수적이지 않다. 그는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법 없이 모두와 호혜적 관계를 맺는다. 타인에게 신세 지지 않는 혜원이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안전’이다. 집에서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셔도, 활짝 열린 대문으로 이웃들이 불쑥 찾아와도, 혜원은 무사하다. 그러나 실제로 “CCTV나 도어록도 없는 곳에서 속도 없다”라는 친구의 핀잔을 혜원처럼 웃어넘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이를 의식한 듯 "여자 혼자 외딴 시골에 산다는 것에 기본적으로 안고 있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씨네 21’) 원작에 없는 설정-반려견 오구(진돗개)와 바로 건너편에 사는 큰고모-을 추가했다. 한없이 평화로운 혜원의 나날은 어딜 가나 불법 촬영의 위험을 안고 ‘안심 귀가’를 걱정하는 오늘날 여성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여유롭고 행복한 홀로서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안전이 전제돼야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는 아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남아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앤·사라·애비게일, 무릎 꿇게 만드는 여성들의 입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그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입’의 권력을 가졌다. 힘이 센 그들은 마음대로 남을 비아냥대고 평가하며 희롱할 수 있다. 사라(레이첼 와이즈)는 총리와 야당 대표에게 "번진 마스카라나 고치고 오라"고 타박한다. 하녀 애비게일(엠마 스톤)은 자신의 뒤에서 ‘어흥’ 장난을 치는 귀족 남성의 뺨을 후려치고 “남자는 여자에게 몰래 다가가선 안 된다"라고 훈계한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은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선 포식자로, 사라와 애비게일을 두고 “참 맛있어 보이네”, “걔가 내 안에 혀를 넣는 게 좋거든” 같은 말을 한다. 영화에서 뒤집힌 현실의 권력 관계는 당장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는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공식 석상에서 "성희롱을 할 만한 사람한테 해야지"라고 발언한 당 대표가 버젓이 정계를 누비는 게 현실이다. 여성이라면 가해자든 피해자든 ‘OO女’라고 호명하는 헤드라인, 사안과 상관없이 줄을 잇는 성적 비하 댓글은 말할 것도 없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 힘 있는 여자들이 있다.

‘오션스 8’ 다프네, 네가 알던 내가 아냐

“당신들 다 엿 먹은 거야.” 다프네(앤 해서웨이)는 일당 ‘오션스’에게 자초지종을 밝히려는 데비(산드라 블록)의 말을 가로막고서 직접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멍청한 백치가 전혀 아니었지”라고 말이다. 그때 비로소 7명의 ‘오션스'가 ‘오션스 8’으로 완성된다. 이전까지 다프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배우이자 1억 5천만 달러짜리 다이아몬드를 금고 밖으로 꺼내 줄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오션스가 짜 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다프네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오션스의 작전을 미리 간파할 만큼 영민했으며 능동적으로 그들을 도왔다. 사실상 판을 장악한 것이다. 다프네의 반전은 편견에 의해 가려졌던 여배우의 직업 정신과 역량을 드러낸다. 여배우에게는 ‘외모에만 집착하고 주변인들에게 무례한’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따라붙지만, 타인이 만들어 낸 허상 뒤엔 주체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그에 맞게 능력을 발휘하는 진짜 배우가 있다. 다프네가 보석 도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보험 조사관을 기만하는 장면은 다프네와 앤 해서웨이가 완전히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내 직업이 참 좋다"라며 턱을 괴고 싱긋 미소 지은 그는 색안경을 낀 모두에게 보기 좋게 뒤통수를 갈긴다.

국가부도의 날’ 한시현, 주류의 아집에 부딪치는 비주류
‘국가부도의 날'의 한시현(김혜수)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서 세계 경제 동향을 살피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에 남다른 통찰력을 가졌다. 그러나 하버드 출신, 재벌, 남성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쉬이 묻히고 만다. 한시현은 일찍이 경제 위기를 예측하고 대안을 모색하지만, 그의 모든 시도는 “대책없이 무능하고 몸만 사리는 윗대가리들”에 막혀 좌절된다. 한시현이 겪어야 했던 모욕과 패배는 여성들의 머리 위 견고한 유리천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협상 저울은 애초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다. 고위층은 약자를 죽이고 강자를 감싸는 위험한 체계를 일궈놓았고, 이기주의와 시장만능자본주의를 ‘이성’으로서 신봉한다. 그들에게 정의나 평등은 ‘중요한 일을 방해하는 감성’에 불과하다. 모순적이게도 정작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여자는 감정적이라서 정부 고위직에 오를 수 없다”, “어디 계집년이 감히”)이야말로 이성 없이 감정만 넘쳐흐른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영원한 실패자로 남을 뻔했던 한시현은 20년 뒤 또 다른 여성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두 번은 지고 싶지 않다”라고 선언한 그가 어떻게 판을 뒤엎을지 지켜볼 일이다.

‘뺑반’
 은시연·우선영·윤지현, 트랙터를 모는 슈마허
‘뺑반’에서 경찰은 비리를 쫓기 위해 전력질주하지만 영화 속 여성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여성은 오직 남성 캐릭터의 활약을 위한 장치로써 소비된다. 경위 은시연(공효진)은 한참 후배인 순경 서민재(류준열)의 ‘매뉴얼 없는’ 수사에 끌려다니고, 계장 우선영(전혜진)이 만삭이라는 설정은 서민재가 그 대신 현장을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한다. 경찰청장과도 당당히 맞섰던 과장 윤지현(염정아)은 영화 중반부 느닷없이 야망에 찬 악역으로 변모해 정재철(조정석)을 돕는다. 영화는 서민재와 정재철이 가진 복합적인 서사를 착실히 쌓아올리는 데 바쁜 나머지 세 여성의 이야기에는 소홀하다.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됐다"라는 상투적인 대사 한마디로 ‘퉁’치는 식이다. 이름을 가진 여성이 각자 직위를 갖고 움직이게 함으로써 기계적인 다양성을 지켜냈을 뿐, 여성을 다루는 방법은 기존 남초 영화들의 것을 답습했다. 그러나 각본과 연출의 한계가 명확한 와중에도 배우 공효진, 전혜진, 염정아는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연기로 평면적인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여성들에게도 슈퍼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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