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마블│② 캐롤 댄버스의 다섯가지 그림자

2019.03.12
MCU 최초의 여성 단독 주연 영화 ‘캡틴 마블’이 극장가를 강타했다. 어벤져스와 함께 타노스를 무찌르고 세상을 지켜낼 영웅, 캐롤 댄버스는 아이들의 모범이자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다. 하지만 캐롤이 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캐롤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엔 당대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성적 대상화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난스러운 코믹스 업계의 기준으로 보아도 캐롤은 무척이나 복잡한 과거를 지닌 캐릭터다. 다섯 가지 코스튬 변천사를 통해 캐롤의 삶을 알아보자.

(좌 상 ‘마블 슈퍼 히어로즈’(1968) #13 캐롤 댄버스의 첫등장 패널) (좌 하 ‘미즈 마블’(1977) #1 페미니즘적 기획의도가 엿보이는 패널) (우 ‘미즈 마블’(1977) #1 표지)
캐롤 댄버스의 탄생, ‘미즈 마블’의 오리지널 코스튬
캐롤 댄버스는 1968년 공군 출신 나사(NASA)의 보안책임자로 처음 등장했다. 원조 캡틴 마블 ‘월터 라슨(본명 마-벨)’과 로맨틱한 관계를 보여주는 보조캐릭터로 등장하다, 어느날 폭발사고에 휘말리면서 마-벨의 크리종족 DNA를 흡수해 초능력을 얻게 됐다는 설정이다. 캐롤이 마-벨의 곁에서 벗어나 '미즈 마블'이라는 이름으로 단독 데뷔한 것은 무엇보다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남성 작가 제리 콘웨이는 ‘미즈 마블’(1977) 첫번째 이슈에서 여자 아이가 범죄와 싸우는 미즈 마블을 보고 "나도 크면 저분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넣어 페미니즘적 기획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코스튬의 살색 비중만 봐도 알 수 있듯 시대적 한계가 크나컸다. 미즈 마블이 처음 입었던 오리지널 코스튬은 능력의 뿌리인 마-벨의 것과 동일한 컬러링을 지니고 있지만, 마-벨과는 다르게도 단순히 여성캐릭터라는 이유만으로 팔, 다리, 배, 등허리의 살갗을 그대로 드러낸 비키니 디자인으로 그를 성적대상화시킨 표현들이 많았다. 오리지널 코스튬에서 읽어낼 수 있는 캐롤 댄버스만의 특징은 공군 파일럿이 착용할 법한 붉은 스카프뿐이다.

(좌 ‘미즈 마블’의 클래식 코스튬 개편 예고 페이지(1978년) (우 악명 높은 ‘어벤저스’(1980) #200 표지)
미즈 마블'의 클래식 코스튬, 씁쓸한 흑역사

미즈 마블의 코스튬 중 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의상은 1978년에 개편된 검은색 클래식 코스튬이다. 가슴에는 마-벨의 고향인 할라의 별 대신 큼직한 번개무늬로 강렬하게 포인트를 줬고, 붉은 스카프는 스타일리쉬하게 허리춤에 묶어서 공군 제복에 두르는 띠를 연상케 한다. 오리지널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수영복 바디수트에 하이힐까지, 여성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는 표현은 여전히 남아있다. 첫번째 ‘미즈 마블’(1977~1979) 이후 미즈 마블은 갈 곳을 잃고 여러 책을 넘나 들며 드문드문 조연으로 등장했다. 미국 만화는 캐릭터의 저작권을 소유한 회사 아래에서 글 작가와 그림 작가 여럿이 함께 작업하는 분업체계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같은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어떤 작가가 작업을 했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성질이 조금씩 달라지는 법이다. 미즈 마블은 수많은 작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본래의 페미니즘적 방향성을 잃었다. 이 당시 미즈 마블이 겪었던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는 ‘어벤저스’(1980) 200번째 이슈의 일을 꼽을 수 있다. 캐롤이 납치와 강간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겪고도 성폭행 가해자의 설득에 넘어가 가해자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사랑의 이민을 떠났다. 마블 코믹스가 써낸 희대의 괴작에 여성 영웅 캐롤 댄버스는 ‘냉장고 속 여자’로 이용당할 뿐이었다.

(좌 ‘언캐니 엑스맨’ (1982) #164 표지) (우 1990년대 ‘워버드’ 코스튬 디자인)
기사회생과 방황, 
‘바이너리’와 ‘워버드’
충격적인 임신 사건 이후로 캐롤 댄버스가 코믹스에 다시 등장하기 위해서는 ‘어벤저스’에서의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야만 했다. 1982년 ‘언캐니 엑스맨’의 작가 크리스 클레어몬트가 캐롤에게 새출발의 기회를 준다. 다른 차원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캐롤은 기존의 초능력과 기억을 잃게 됐지만, 그 덕에 어벤저스와 인연을 끊고 엑스맨의 영웅들과 함께 지내며 새로운 코스믹 파워를 습득해 '바이너리'라는 이름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인간이기보다 살아있는 불꽃과도 같은 바이너리의 겉모습에는 본래 캐롤 댄버스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바이너리로서의 캐롤 댄버스는 마블 유니버스에 좀처럼 자리잡지 못하고 점차 잊혀지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 캐롤은 코스믹 파워를 잃고 어벤저스의 곁으로 돌아와 팬들에게 사랑받는 클래식 코스튬으로 복귀하는데, 이때는 미즈 마블이 아닌 '워버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잠깐뿐이지만 특수요원 느낌의 심심한 갑주 코스튬을 입기도 했다. 코드 네임과 착용 의상을 여러번 바꾸고 초능력과 기억을 잃는등, 캐롤은 캐릭터성과 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좌 ‘미즈 마블’(2006) #1 표지) (우 ‘캡틴 마블’(2012) #1 표지)
여성 작가가 쓰는 캐롤 댄버스, ‘캡틴 마블’ 코스튬
2000년대에 접어들어 다시 원점으로, 캐롤은 ‘미즈 마블’로 돌아와 클래식 코스튬을 다시 입었다. 두 번째 ‘미즈 마블’(2006~2010)이 연재되는 동안 캐롤은 어벤저스의 리더가 되기도 하면서 주류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원조 캡틴 마블의 모습을 빌려 쓴 외계인 ‘스크럴’과 마주치는 등 자신의 기원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던 것이 주목할 사항이다. 이러한 흐름의 결과로 여성 작가 켈리 수 디코닉이 캡틴 마블을 맡아 쓰게 된 것이 2012년의 일이었다. 제이미 맥켈비가 디자인한 '캡틴 마블' 코스튬은 이전과 달리 성적 대상화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캡틴 마블 본연의 컬러링과 별 무늬를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진중한 제복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실로 이름에 걸맞는 전통과 캐롤만의 특별한 개성이 섬세하게 조화를 이룬 코스튬이었다. 디코닉은 ‘캡틴 마블’(2012~2014)의 첫번째 스토리로 캐롤의 기원을 살펴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벨과의 폭발사고 당시 상황에 다시 한번 놓인 캐롤은 ‘위기에 빠진 여인(Damsel in Distress)’에 불과했던 과거의 자신을 구해내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라는 선택권을 갖게 된다. 캐롤이 고민 끝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영웅이 될 것을 결정하게 만들어 캐릭터에게 전에 없던 주체성을 안겨준 것이다.

(좌 ‘캡틴 마블’(2014) #17 표지, 다양한 구성의 팬덤 ‘캐롤 코어’가 함께하고 있다) (우 ‘라이프 오브 캡틴 마블’(2018) 카말라 칸과 옷을 바꿔입은 특별 표지)
오늘날 캐롤 댄버스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캡틴 마블의 등장은 코믹스 업계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듬직한 리더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약점이 함께하는 캐롤 댄버스에게 팬들은 환호했다. 이들 ‘캐롤 코어'는 열렬한 응원으로 ‘캡틴 마블’ 연재를 뒷받침해주었고, 그 덕에 캡틴 마블은 마블 유니버스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코믹스는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해 쉴 새 없이 발전하고 있다. 캐롤의 의지를 잇는 새로운 '미즈 마블'이자 최초의 무슬림계 십대 히어로 카말라 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원조 미즈 마블인 캐롤이 캡틴 마블로서 안정적으로 정착한 덕분이었다. 이제 캐롤은 타인의 능력을 우연히 전달받아 활약하는 영웅이 아니다. 크리족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힘, 태어날 때부터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었던 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다(‘라이프 오브 캡틴 마블’(2018)). 이처럼 다사다난한 과거를 캐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캡틴 마블: 더 용감하게, 더 강인하게’(2019)에서 캐롤은 즐거우나 괴로우나 그 모든 일들이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나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며, 자신있게 자신의 모든 역사를 포용한다. 강한 여성 캐롤 댄버스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날아오를 그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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