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그녀는 당신의 남편에게 반하지 않았다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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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지사에게 2심 재판부는 징역 3년 6개월에 더해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수강 명령을 선고했다. 성폭력 치료 수강 제도는 교육을 통해 범죄성을 개선하고 출소 후 사회 재적응에 성공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주요 내용은 왜곡된 성의식 변화 및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재인지하는 인지 공감 훈련 등으로 이루어진다. 잘못 구성된 핵심 신념을 재구조화하면 재범죄율을 낮출 수 있다고 보는 인지모델(cognitive model)에 기반한 행동치료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도 이 치료모델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건 당시 자신의 행동을 복기한다. 그리고 그게 최선이었을까를 수없이 물으며 자신의 정신건강을 스스로 위협한다. “내 잘못이 아니었을까?”라고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전히 더 많이 해줘야 하는 이유다.
가해자는 어떨까? 가해자 교육 프로그램의 핵심은 사건을 다시 구성해보는 것이다. 한번은 가해자 입장에서, 한번은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보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신념을 찾아낸다. 가해자들은 이 과정을 가장 힘들어한다. 가해자의 주장은 결국 한가지다. 피해자가 유혹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건이 일어난 전후의 표정, 옷차림, 태도, 말씨 등 온갖 비언어적인 행동들의 뉘앙스를 종합하여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부하 직원이 평소에 자신이 이야기할 때 유난히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지었다거나, 애인이 있다는 걸 ‘숨겼다’는 것이 관심의 증거라고 주장하다. 요즘은 구직자나 부하 직원에게 애인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성희롱이 된다고 말하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 되었냐며 분개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교육 효과는 전혀 없다. 잘못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묘사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할 때마다 나는 ‘그녀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책을 하나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미투 이후에 필요한 건 펜스룰이 아니라 직장 내 불륜을 꿈꾸는 상사를 위한 대중캠페인 “그녀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부장님 그건 성희롱이에요”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 착각은 가해자만의 것이 아니다. 종종 가해자의 가족, 특히 아내들도 이런 착각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된 한 배우의 아내는 유투브 방송에 출연해 남편의 결백을 주장하며 피해자를 비난했다. 가해자의 아내가 피해자가 자신의 남편을 흠모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불륜의 구체적 증거 하나 없이 가해자의 아내는 피해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묘사하며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이유를 댄다. 대체로,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착각이 거의 유사하게 반복된다. 아내의 목소리가 성공적으로 공론장을 지배하게 되면 다수의 피해자가 나선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은 갑자기 매력이 넘치는 권력자 남성을 둘러싼 여자들의 암투로 장르가 달라져 버리고, 공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해결되어야 할 성폭력 사건은 질투와 불륜의 막장극이 되어버린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남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지켜주는 아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남편이 의리를 지키지 않아도 아내가 봐주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사적인 의리가 공적인 정의보다 더 강력한 생활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은 오직 가족과 관련해서만 의리를 지킬 것을 요구받는다. 여성의 명예와 평판이 여전히 정상가족을 잘 유지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결과,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엄마가 나서서 침묵하라고 종용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가족중심주의의 무서운 일면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것 역시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다. 가해자가 착각의 늪에 빠져 자신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면, 가해자의 가족 역시 똑같은늪에 빠지게 된다.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가해자 가족이 사적 의리와 공적 정의가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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