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아가 선택한 배역들

2019.01.28
JTBC ‘스카이캐슬’에 출연 중인 염정아는 1991년 데뷔했다. 30년 가까이 연기를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 폭을 넓혔고, 그것은 한국에서 여성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염정아가 연기한 배역 중 다시 한 번 곱씹을 필요가 있는 다섯 개를 골랐다. 염정아가 얼마나 그만의 길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 여미옥(2004)

여미옥은 초등학생 제자에게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히스테릭한 여성이다. 오죽하면 화가 난 어린 제자 고미남(이세영)이 그를 비꼬기 위해 ‘노처녀’라는 시를 지어 장학사들 앞에서 낭독할 정도다. 새로 부임해 온 젊은 미술교사 권상민(이지훈)에게 반해 푼수처럼 쫓아다니는 여미옥은 호들갑을 떨다가 남자 화장실에서 그와 마주치기도 하고, 얼토당토 않은 스킨십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마냥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여미옥은 염정아의 세밀한 감정 연기를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에 어려 있던 편견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가 됐다. “초등학교 5학년 애들 기는 초장에 잡아야 한다.”며 자신만만하게 엉덩이를 씰룩이며 걷고, 이세영을 볼 때면 꿈틀거리는 눈썹과 입꼬리로 분노를 억누르는 염정아의 모습은 소위 ‘노처녀’ 여자 교사에 관한 편견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하지만 ‘노처녀’라는 시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해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혹은 결혼하지 않기를 택한 한국 여성들의 삶이 왜 그리 부끄러움으로 점철돼야만 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리 건방졌다고 해도 초등학생 제자의 뺨을 때리는 모습이나 “맞을 만하면 맞아야지”라는 학부모들의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거북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자를 때리고 자신이 더 놀라 흔들리던 눈빛은 아이의 상처와 자신이 갖고 있던 상처가 같다는 점을 발견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변하는데, 이 과정을 응축한 대사가 바로 “미안해”라는 한 마디다. 염정아가 만든 여미옥은 우스꽝스럽지 않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잘못된 행태를 스스로 극복한 여성의 고군분투가 우스울 리 있을까.

# 드라마 ‘로열 패밀리’ 김인숙(2011)

MBC ‘로열 패밀리’에서 집안 사람들이 김인숙을 부르는 호칭은 “K”다. 출신 성분이 천하기 때문에 이름조차도 부르기 싫다는 재벌가 사람들을 두고도 “좋은 분들”이라며 감싸는 그는 그동안 염정아가 연기한 인물 중에 가장 애달프고 여린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던 JK가 사람들과 대치하기로 마음먹은 후, 점차 그의 어깨와 허리는 꼿꼿하게 펴진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남편의 죽음 이후에 혼전계약서에 따라 쫓겨난 그는 눈물밖에 흘리지 못하던 사람으로 보였지만 어느새 권력에 도전하고, 나아가 냉철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세 단계의 변화를 연기하는 동안 염정아는 “이거, 저거”라는 소리를 들어도 참고 살던 무기력한 여인이 자신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권력에 환멸을 느껴 급기야 그 권력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설득한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던 여성이 재벌가 총수 자리에 오른다는 설정이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팔 동작이 거의 없고 보폭도 작던 그가 점차 활달하게 움직이고 눈빛에 생기가 돌면서 자신을 핍박하던 시어머니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낼 때, 염정아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깃들어 있다. “제가 벼랑 끝에 설 일 있으면 꼭 밀어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지금이 그 기회예요. 이번에도 머뭇거리시면, 어머니가 될 거예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 김인숙은 연약한 것 같지만, 정말 큰 도전을 보여준 여성이었다.

# 영화 ‘카트’ 한선희(2014)

한국에서 최초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를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봐야 이 영화 제작의 의미를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주류 영화계에 계신 배우들, 스태프들을 모셨다.” 그의 말처럼, 주류 영화계에 있는 염정아도 크라우드 펀딩을 받아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뉴스룸’)”는 인터뷰 내용처럼 노동의 권리가 아니라 노동의 대가에만 관심이 있는 평범한 여성 한선희를 연기했다. 그는 ‘카트’에서 죄인처럼 목과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지만, “저 반찬 값 아니고 생활비 벌러 나와요.”라는 말을 하며눈빛이 변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경제력 없는 여성이 자신의 생존을 ‘반찬 값’으로 비하하는 남성 앞에서 변하는 순간에 담긴 의미는 점차 곧게 펴지는 어깨, 손끝까지 서서히 힘을 주는 그의 연기를 통해 와 닿는다. 한선희는 눈앞의 생존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 모두의 생존을 꿈꾸는 사람으로 변했고, 염정아는 “영화를 찍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고,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이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영화 ‘완벽한 타인’ 수현(2018)

수현은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남편 태수(유해진)에게 속절없이 이끌려 다니는 인물이다. 태수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수현에게 신경질을 내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수현이 자녀 교육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기도 한다. 염정아는 매사 급하게 종종거리고 다니지 않으면 남편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수현의 심리상태를 연신 다급한 몸짓으로 표현한다. 긴 치마를 입고 신체에 노출된 부위가 없는지 살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남편을 설득해 성관계를 갖고 싶은 마음은 초조하게 치마를 매만지거나 남편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런 섬세한 표현은 남편 태수를 비롯해 어떻게 해서든 거짓말을 숨기려던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더욱 대비되는 수현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휴대전화로 음란 채팅을 한다는 사실을 숨기려던 태수를 게이로 오해하고 한꺼번에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웃음과 눈물이 함께 터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실상 이 영화는 태수와 수현 부부보다 더 심각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부부들의 사례로 큰 고민을 안긴다. 그러나 문학모임 친구의 전화를 받고 눈을 반짝이던 수현이 결국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못 이겨 사람들 앞에서 갑작스레 치마를 걷어 올리고 신체를 노출하는 장면은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꼬는 블랙 코미디의 완성형이라 해도 될 정도로 강렬하다. 울면서 왜 그랬냐고 남편을 원망할 것 같던 여성이, 뒷모습만으로도 분노를 전달하는 현모양처 반란군이 된다. 가장 일상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통쾌하게 가부장제의 뒤통수를 친 연기.

# 드라마 ‘스카이캐슬’ 한서진(2018~2019)

‘스카이캐슬’ 속 염정아는 철저히 결과 지향적이며, 계획적이다. 온갖 욕망으로 꽉 찬 한서진의 속내는 남편 강준상(정준호)의 편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사실상 그를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에 이용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눈을 부릅뜨거나 욕설을 하다가도 이성을 되찾고 감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한서진에게서 염정아가 찾아낸 두려움이다. 자식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멍하니 정신을 놓은 한서진의 눈빛은 마치 JTBC 영상 인터뷰에서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던 실제 염정아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이캐슬’은 한서진, 그리고 염정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염정아는 ‘완벽한 타인’에서도 가장 커다란 반전을 선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로열 패밀리’에서도, ‘카트’에서도 마침내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카이캐슬’은 그동안 염정아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성취를 모아놓은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방송계와 영화계가 염정아의 부름에 화답하는 일만 남은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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