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함께하는 네 개의 전시

2019.01.25
마르셀 뒤샹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8.12.22. ~ 2019.04.07.

예술사에 길이 남은 변기가 있다. 볼품없는 그곳에서 현대미술은 싹을 틔웠고, 대중들은 미술을 난해한 것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기념비적인 순간이지만, 그것만으로 창작자인 마르셀 뒤샹을 설명해버리긴 아쉽다. 이후 그의 많은 작업들 또한 못지않은 논쟁점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뒤샹과 깊은 인연을 가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소장작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전시 ‘마르셀 뒤샹’은 스스로의 작품을 하나의 컬렉션으로 만드는 데 골몰해왔던 작가의 시도가 반영된 전시라고 칭찬할 수 있을 만큼 뒤샹을 상세하게 조망한다.

뒤샹의 작품은 레디메이드, 인프라신, 정밀과학 등 그가 직접 만든 복잡한 개념들이 반영되어 까다롭고, 대충 봐서는 일관성 없이 난잡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개념만을 갖고 놀았다는 오해를 떨쳐주고, 그의 여성 자아 ‘에로즈 셀라비’는 변모하는 작가의 열정을 보여주며, <큰 유리>와 <에탕 도네>는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끈기를 느끼게 해준다. 뒤샹은 화가로, 기획자로, 체스 선수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멀티플레이어였고, 표현의 매체를 바꿔가며 대중들의 프레임을 깨나가는 선각자였다.

사실 뒤샹의 작품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여타의 작품들보단 공부해야할 내용이 많다보니 가볍게 관람하기가 어렵다. 전시장의 깨알 같은 텍스트를 벽에 붙어 필사적으로 읽기엔 관람객이 너무 많고 분량도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앱의 전시설명을 참고하고 너무나 저렴한 입장료도 고려한다면, 뒤샹의 세계를 섬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커피사회

문화역서울 284, 2018.12.21. ~ 2019.02.17.

작업할 때, 미팅할 때, 휴식할 때,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순간에 가장 절실한 것은 커피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이 마법의 음료는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들었고, 시도 때도 없이 곁에 두어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중독적인 존재가 된다. ‘커피사회’는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던 이 커피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 사회를 읽는 전시다.
1920년대부터 등장한 카페문화는 이후에 나타난 수많은 청년문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고, 낙랑팔러, 소설가 이상이 운영한 제비다방 등이 대표적이다. 전시는 당시의 정취를 낭만적으로 소개하는데, 신청곡리스트가 빼곡한 가상의 음악다방이 연출되고, 360sounds의 큐레이션으로 다양한 공연과 세미나들이 기획되기도 한다. 백현진 작가는 방 전체를 1.5톤의 원두로 가득 채워 그것을 만지고 밟고 맡으며 커피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한다. 요즘의 핫한 카페들도 빼놓을 수 없다. 경성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 ‘그릴’의 자리에 펠트, 프릳츠, 헬카페 같은 동시대의 카페들을 초대해 이들의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여 모던보이, 모던걸의 감성을 자아낸다.
입장료를 포함한 모든 서비스는 무료인데다 전시장 곳곳에 카페의 역할을 수행하는 휴게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 누구나 여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진지하고 엄숙한 전시공간을 커피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체험하는 복합문화공간이자 커다란 카페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관객은 그저 보통의 카페를 이용하던 것처럼 전시장에서 편한 시간을 보내다 오면 된다.

키스해링 :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DDP 디자인전시관, 2018.11.24. ~ 2019.03.17.

이 낙서 같은 그림이 예술 작품이라고? 교과서 한 귀퉁이에 그려봤을 법한 이 장난 같은 그림이 바로 1980년대 뉴욕의 팝아트를 대표하는 화가 키스 해링의 작품이다. 굵고 과감한 선과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감, 여백을 빼곡히 채우는 그의 작업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전시 ‘키스해링’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그의 작품 175점을 소개한다. 뉴욕 지하철의 그래피티로 시작해 포스터, 사진, 판화, 드로잉, 조각 등을 망라하며 불꽃같던 10년간의 활동을 보여준다. 대립자 역할을 하는 예술가로서 해링은 베를린 장벽에 초대형 벽화를 그리는 등 공공미술 제작에 관심을 두었으며,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협업을 마다하지 않는 등 미술을 소통의 도구로 삼아 시대의 아이콘다운 행보를 보였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31세에 사망하지만, 절망을 걷어낸 낙관적인 그의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전한다.
해링은 부유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작품을 소유하기보다는, 자신의 작업을 활용한 제품을 판매하는 ‘팝 숍’을 열어 누구나 그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도록 했는데, 예술의 지나친 신성화와 상업화를 경계하는 작가의 열린 태도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비싼 티켓을 사고 관람하는 전시장 안 그의 작품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의 전시지만, 핀 조명을 맞으며 우뚝 서 있는 그의 조각보다 행인들의 티셔츠에 프린트된 그의 이미지가 키스 해링의 진실한 면모를 더 잘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일 : Matters of Women

서울대학교미술관, 2018.12.27. ~ 2019.02.24.

여성 작가는 무엇이 특별한가. 이들은 보통의 (남성) 작가들과 단지 성별이 다를 뿐이지만, 그 덕에 경험하는 문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또는 절대적으로 불행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정정엽 작가는 2000년 여성예술가그룹 ‘입김’의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 중 남겨진 네 폭 치마 ‘페미니즘 미술 큰 마당’을 다시 이야기한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상징으로서 종묘를 여러 폭의 치마로 두르려던 당시의 시도는 반대세력의 방해로 훼손되고 말았지만,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법적투쟁으로 이어졌던 그들의 유의미한 행동은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에 역사적 무게를 실어준다. 여성의 성기와 오밀조밀한 돌기들, 시선이 결합되어 화려하게 채색된 장파 작가의 드로잉과 박자현 작가가 점묘화로 표현한 비정규직 여성들의 이미지도 눈에 띈다.
요즘의 우리사회는 페미니즘의 열기로 가득하다. 과거보다 차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 같지만, 누구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에 없던 변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새롭지 않을지라도,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려는 시도들을 한 데 모으려는 자리는 그래서 소중할 수밖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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