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리티

여진구의 얼굴

2019.01.23
tvN ‘왕이 된 남자’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임금 이헌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과 같은 얼굴의 광대 하선을 왕좌에 세운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한 사람이 광기 어린 왕과 천진난만한 광대를 오롯이 다른 사람으로 인식시켜야 하는 이 고난이도의 드라마에서, 여진구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정선을 오가며 이헌과 하선의 괴리감을 표현해낸다. 아버지로부터의 애정 결핍과 살해 위협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뚤어진 이헌이 흐릿한 동공과 서늘한 표정, 광기 어린 분노를 표출하는 냉혹함으로 표현되는 반면, 하선은 때묻지 않은 광대로서 천진난만한 미소와 맑은 눈동자,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투명한 표정으로 묘사된다. 마침내 이헌과 하선이 마주하는 순간,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는 이헌과 영문을 모른 채 두려움에 떠는 하선의 모습을 통해 여진구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의 존재를 설득한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아역이었던 배우. 8살에 ‘새드무비’에서 엄마와 작별해야 하는 슬픔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들로 데뷔했던 여진구는 영화 ‘서양골동과자점 엔티크’와 ‘예의없는 것들’, 드라마 SBS ‘일지매’와 ‘타짜’, ‘자이언트’ 등의 작품에서 주로 주인공의 질곡 있는 어린시절을 연기하며 작품 초기 서사의 감정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배우 여진구가 빛나기 시작한 건 그가 아역답지 않은 성숙함을 띠면서부터였다. MBC ‘해를 품은 달’에서 16살의 여진구가 연기한 이훤은 첫사랑 연우(김유정)에게 아이처럼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성인 남성의 향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이훤이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연우를 생각하며 씩 웃거나 이별을 예감한 듯 처연한 눈빛을 하는 모습은 급기야 성인 여성들이 97년생 배우에게 ‘여진구 오빠’라 부르는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 유독 낮은 옥타브의 목소리와 다부진 체격은 아역인 그가 성인 남성과 유사한 매력을 어필하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실제로 tvN 시트콤 '감자별 2013QR3'에서는 당시 나이보다 7살 많은 24세 청년을 연기했고, 영화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12세 연상의 이민기와 동갑내기 친구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성인 연기를 해야겠다’고 억지로 해도 봐주시는 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고, 나이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시크뉴스')고 소신을 밝힌 것처럼 나이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보다는 역할과 연기라는 본질에 충실했다. 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여진구가 연기한 화이는 그와 또래의 인물이었다. 5명의 범죄자 아버지들에게 길러졌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화이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면서, 여진구는 나이와 관계없이 한 명의 배우임을 인정받았다. ‘왕이 된 남자’에서 하나의 얼굴만으로 전혀 다른 두 인물을 표현하기까지, 여진구는 질곡 있는 주인공들의 어린시절, 천진난만함과 내면의 슬픔을 동시에 간직한 임금, 선과 악을 오가는 소년처럼 수많은 얼굴들을 성실하게 학습해왔다.

‘왕이 된 남자'에서 이헌은 광기어린 분노를 표출하다가도 아이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빈말이라도 좋으니 안심하라, 죽을 힘을 다하겠다 그리 말할 수 없겠는가!”라며 충신 이규(김상경)을 다그치는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고, 하선 역시 주변에 순수한 선의를 베풀며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이지만 동생 달래(신수연)에게 벌어진 비극 앞에서 분노를 참지 않고 스스로를 냉혹한 운명에 몰아넣는다. 극과 극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단순히 선악이나 권력 유무의 이분법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여진구는 단순히 두 인물을 분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복합적인 내면과 세밀한 감정이 스치는 찰나를 포착해내며 그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셔도 오빠로 느껴진다면 상관없어요. 저는 오빠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불러주신다면 오히려 감사해요.”(레이디경향) 많은 이들에게 혼란을 준 '오빠'라는 본인의 수식어에 대해 정작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그 배우는, 이제 광대가 진정한 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연기한다. 광대이든, 왕이든, 혹은 오빠든 자신이 무엇으로 불리는지가 여진구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청자들을 다시 혼란에 빠트릴 준비가 되어있다. 언제라도 새로운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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