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크릿에 닥친 위기

2019.01.14
몇 년 전 고급 란제리 브랜드들의 행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예컨대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가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걸 입고, 이런 섹시한 옷을 입는 게 자신감을 만들어 준다는 태도였다. 게다가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거대 기업의 한 부분이 된 이후 어딘가 지지부진하던 패션계에 비해 여기엔 생동감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쇼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패션은 주류 패션계를 뒤집어 놓으며 패션이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변화와 확장을 불러왔다. 또한 인종 다양성, 성지향성, 자기 몸 긍정주의, 건강 중시 등의 이슈가 부각되며 패션은 타인의 시선 중심에서 자신의 만족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긴 다리에 마르고 글래머러스한 몸 같은 비현실적인 뷰티 스탠다드는 이제 구시대 패션의 상징이 되고 있다. 지금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구찌나 발렌시아가, 베트멍의 패션쇼에 그런 옷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다. 한때 도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섹슈얼한 광고를 만드는 브랜드들도 이젠 거의 없을 뿐더러 내놓아 봐야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뿐이다.

특히 미투 운동 이후 사람들은 브랜드의 태도와 지향점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브랜드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떤 브랜드는 과거의 영광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그렇잖아도 획일적인 몸의 형태에 대한 판타지를 표방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내놓고 있던 브랜드였다. 그런데 변화에 대한 브랜드의 태도는 오히려 반감에 불을 질렀다. 회사의 최고 마케팅 경영자는 한 패션지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쇼는 주요 고객에게 판타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라며 트렌스젠더 모델이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또한 출시 제품의 사이즈 범위를 확대할 계획 역시 없다고 말했다. 곧 큰 반발이 일었고 결국 사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굳이 경영자의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변화의 영향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거의 모든 매장의 매출이 몇 년 째 줄어들고 있고 2013년 1천만 명에 가까웠던 빅토리아 시크릿 쇼의 18~49세 시청자 수는 매년 감소해 2018년에는 330만명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몇 년 째 순위에 올라있던 '미국 10대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10' 리스트에서도 작년에 이름이 빠졌다. 번쩍거리는 옛날 서커스 같은 패션쇼는 패션 크리틱 로브 기브한의 지적대로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비판 같은 걸 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다. 이미 시효가 지난 거다.

이런 상황에서 반사 이익을 누리는 곳들이 있다. 리안나의 란제리 브랜드 SAVAGE X FENTY는 다양한 속옷 사이즈를 내놓고 동시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과 여러 인종을 기용한 광고 캠페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필요없다는 발렌타인 컬렉션의 홍보 문구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기존 광고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된다.

또한 편안함과 실용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기 몸 긍정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아메리칸 이글의 에어리(Aerie)는 매년 큰 폭으로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 모회사인 아메리칸 이글은 10대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모두를 위한 속옷을 표방하는 브랜드 써드러브(ThirdLove)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쇼는 판타지지만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산다”는 오픈 레터를 뉴욕 타임즈에 전면 광고로 싣기도 했다.

물론 빅토리아 시크릿의 번쩍거리는 란제리가 세상에 필요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취향은 실로 다양하고 세상 어딘가에는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제는 대형 패션쇼와 수많은 매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화려한 란제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굳이 편협한 세계관을 전면에 드러내는 브랜드를 제 발로 구입할 이유도 없다. 대안은 수도 없이 많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작년 말 CEO를 바꾸는 등 변화를 시작했다. 패션은 이미지와 태도의 산업이므로 전망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성공하든, 혹은 시대의 변화를 눈치재지 못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든 올해 이 브랜드의 행보는 모두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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