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김호정의 ‘닥터후’, 조아라의 ‘그들이 사는 세상’, 조한나의 ‘맨하탄 러브스토리’,

2019.01.04
‘닥터후’ (왓챠플레이)

‘주의가 다소 산만함.’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들은 ‘경도비만’과 더불어 내 생활통지표에 이 잔인한 문장을 욱여넣어주셨다.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고쳐지진 않았다. 인정하면 편하니까.

‘프리즌 브레이크’나 ‘왕좌의 게임’처럼 거대한 시리즈는 엄두도 안났다. 어려운 다큐멘터리는 질색이었다. ‘닥터후’는 다르다. 한 에피소드에 60분을 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이다. 인물구조와 스토리라인도 아주 간단하다. 시공간을 여행하는 ‘닥터’와 지구에서 만난 친구들이 우주의 평화를 지킨다. 천체 물리학과 엔지니어링, 컴퓨터 공학까지 수많은 과학기술이 등장하지만 드라마는 그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동성애, 노동권, 페미니즘 등 여러 담론들을 담지만 깊지 않다. 그저 살짝 건드릴 뿐이다. 일단 닥터가 진지하지 않다. 산만하고, 수다스럽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한다. 산만함의 뒷면에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며 의심한다. 그리고 묻는다. ‘Why?’ 수많은 질문의 끝엔 언제나 답이 있다. 50여 년간 드라마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데카르트의 그것과 닿아있다. ‘Cogito, ergo Sum’

산만하다고 자책하지 말자. 타박하지도 말자. 호기심만 지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프로 산만러들이여, 라면 한 그릇 끓여 모니터로 모여라. 아 물론 계란은 두 개.
글. 김호정(tbs PD)

그들이 사는 세상(VOD)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흘러야 빛나는 드라마가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빈과 송혜교를 캐스팅 했음에도 ‘타짜’와 ‘에덴의동쪽’에 밀려 2008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불륜이나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같은 자극적인 소재 대신 현실적인 사랑과 관계에 집중한 이 드라마의 명대사들은 지금까지도 SNS에 돌아다니고 있다.

옛 연인이었던 주준영(송혜교)과 정지오(현빈)는 드라마 PD지만 정작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는 서툴다. 그들이 직장 선후배와 연인 사이를 오가며 만드는 마찰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항상 치부였던 엄마의 비밀을 두고 “왜 어떤 관계의 한계를 넘어야 할 땐 반드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아픔을 공유해야만 하는 걸까.”라는 준영의 고민이나,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나는 저 아이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라고 털어놓는 지오의 독백은 연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다.

현빈과 송혜교의 10년 전 풋풋한 모습이나 매 회마다 잔잔하게 등장하는 준영과 지오의 나레이션도 묘미지만, 드라마 속 모든 조연들이 주연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갖는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PD와 작가 또는 배우들은 수많은 신경전을 벌이고 그 속에서 저마다의 적당한 선을 찾는다. 드라마를 만들어나가는, ‘그들이 사는 세상’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라는 지오의 대사처럼 늘 뒤통수를 맞고, 인간관계를 고민하고, 가끔은 행복한 모든 장면이 결국 우리가 만드는 인생이란 드라마 아닐까. 인간관계에 지칠 때마다,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이라는 대사를 떠올리며 ‘그들이 사는 세상’을 찾아보게 되는 이유다.
글. 조아라(프리랜서, 요가 강사)

맨하탄 러브스토리 (일본 TBS)

찬바람이 싸늘하게 귓불을 스치어 불어와, 괜히 외로워지는 12월에는 꼭 다시 보게 되는 드라마가 몇 개 있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 이야기할 ‘맨하탄 러브스토리’이다. 15년 전인 2003년, 가을-연말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말 그대로 맨하탄에서 일어나는 러브 스토리다. 하지만 ‘맨하탄’은 지명이 아닌 가게 ‘순수찻집 맨하탄’ 의 이름이다. 좀처럼 말하지 않는 점장 H와 그 옆을 지키는 점원 G, 오래 앉아도 뭐라 하지 않아 날마다 앉아 드라마를 집필하는 작가 C, 너무 많이 일하는 성우 D, 여사친이 너무 많은 댄서 B, 일부러 사투리를 쓰는 아나운서 E. 이 가운데 택시기사 A가 순수찻집 맨하탄에 발을 들이며 꼬리 잇기 같이 사람들은 관계가 엮이고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 속에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매우 많다. 커피를 만드는 점장은 손님이 커피를 마시는지 남기는지를 가지고 스스로 내기를 건다. 커피숍인데 손님들은 나폴리탄을 더 좋아하거나, 순수찻집인데 결국 티브이와 가라오케, 만화책이 생긴다. 나는 좋아한다고 마음을 전했는데 상대방은 의도와는 다르게 싫다고 받아들이거나 하며, 결국에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오히려 드라마 속의 드라마가 실제로 있는 이야기가 되면서 무엇이 현실인지도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너무나 직접적이라 정말로 있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 모든 말도 안 됨은 ‘사람이라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라서’, ‘사람의 감정과 결정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가 된다. 이야기가 발전되면서 발견되는 불륜 코드와 예상치 못한 빠른 전개는 개운치 못한 기분을 주지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설정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매년 챙겨 보게 되는 이유는, 선을 넘지 않는 설정 속에서 마지막까지 경쾌한 리듬으로 끌고 가는 쿠도 칸쿠로의 각본 덕분이다. 휘몰아치는 복선들을 노련하게 연기하는 배우들의 역량과 매력도 한몫을 한다. 그 뒤 에피소드마다 쇼와 시절 보석 같은 명곡이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 또한 이 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니, 듣는 재미를 꼭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따듯한 침대에서 편하게 자세를 잡은 후, 꾸덕꾸덕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과 웨하스를 옆에 두고 먹으며 본다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될 것이다. 커피는 안된다.
글. 조한나(EARWIRE A&R / Music Promo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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