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서한나의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미깡의 ‘원 데이 앳 어 타임’, 안난초의 ‘수박’

2018.12.28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넷플릭스)

‘담백’과 ‘찐득’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주인공 레베카는 찐득 세제곱쯤 될 것이다. 길에서 마주친 전 애인이 ‘행복해 보여’ 그가 사는 동네로 이사 간다. 드라마의 시작은 레베카의 빈 곳을 짐작하게 한다. 누군가는 레베카가 인간관계에 제멋대로이며 불안정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감정 문제에 집요한 레베카를 좋아한다. 덕분에 ‘심리학’ 드라마가 된다.

그는 끝까지 간다. 레베카가 전애인의 현애인을 미행할 땐 따라가고 싶고, “난 집착에 학사, 석사, 박사 학위가 있지” 하고 노래 부르며 까불 땐 옆에서 가슴을 튕기며 흥을 돋우고 싶다. 친구들과 수다 떨다 ‘남자는 구리다’로 의견을 모으곤 “남자를 일반화 해“("Let's Generalize About Men")라는 노랠 부를 땐 그룹에 끼고 싶다. 레베카는 끝까지 가서 뭔가 줍는다. ‘남자에게 집착한 이유는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였어’ 같은 해석을. 자기가 왜 이러는지 아는 사람이다. 이 드라마엔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과 그 찐득함을 닦아주는 폭넓은 이가 적절히 섞여 있어, 관계를 지켜보는것도 묘미다.

누군가는 레베카를 철부지라고 평한다. ‘미운 우리 새끼’를 언급하며 “아, 이게 철없는 거죠” 항변하지 않더라도, 레베카는 우리가 아는 철부지들보다 똑똑하다. 성별임금격차를 소재로 농담하는 물정에 밝은 사람이고 자신을 알려는 사람인 데다, 이 모든걸 내팽개치고 날 웃기는, 소중하게 ‘미친’ 이다. 어서 철들지 않은 이 여자를 사랑해달라. 세상이 ‘철없는 남자’를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철없음을, 집요함을, 빈 공간을 쓰다듬자.
글. 서한나 (‘보슈’ 편집장)

원 데이 앳 어 타임(넷플릭스)

‘원 데이 앳 어 타임’은 미국에 사는 쿠바 3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시트콤이다. 가장인 페넬로페는 어머니와 두 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싱글맘으로, 연일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지는 집안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의 엄마 리디아는 쿠바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열적인 여성이다. 공주병이 있는데다 ‘여자는 항상 예뻐야 한다’는 말을 해서 손녀 엘레나와 대립각을 세운다. 엘레나는 페미니스트이자 각종 사회 이슈에 관심이 높은 고교생으로, 시즌1 중간에 동성애자로 성정체화한다. 알렉스는 누나와 달리 멋 부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자기애가 강한 귀여운 소년. 이렇게 네 명의 가족, 그리고 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수시로 들락거리는 한량 건물주 슈나이더가 극을 이끌어 간다.

‘원 데이 앳 어 타임’이 여느 가족 시트콤에 비해 더욱 특별하고 빛나는 이유는 민감한 사회 이슈를 매회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페넬로페는 워킹맘이자 싱글맘으로 사는 게 고단하다. 직장에서는 남녀차별을 받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전 참전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국가의 처우는 엉망이다. 엘레나는 십대-여성-레즈비언으로서 비주류, 소수자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자각하게 된다. 애초에 이 가족은 이민자로서 차별적인 시선 안에 살고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지만 이 드라마는 전혀 근엄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유쾌하고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사실 ‘PC’를 유지하면서 웃긴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예능과 코미디가 언피씨한 방식으로 손쉽게 웃기려 드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웃기기까지 하다니, 그 어려운 일을 해냈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귀하다. 그러니 당신의 귀한 주말 시간을 여기에 할애해도 절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미깡 (웹툰 작가)

수박(일본 니혼TV)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떤 냄새를 떠올리며 멸망 전의 지구를 그리워하게 될까. 의식이 살아있다면 나는 아마도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의 꼬릿꼬릿하고 따뜻한 털 냄새를 떠올리게 될 테지만 좀처럼 말이 없는 한 초등학생은 그것이 카레 냄새인 것 같았다. 카레. 그러고 보니 카레의 냄새도 일상적인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로 손색이 없다. 다양한 향신료와 채소들이 끓으며 풍기는 잊을 수 없는 맛있는 냄새. 1983년 여름, 한 명의 중학생과 두 명의 초등학생이 ‘해피니스 산차(ハピネス三茶)’라는 하숙집 앞에서 흘러나오는 카레 냄새를 맡는 것으로 ‘수박’이라는 이름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20년 후, ‘해피니스 산차’에는 꽤 특이한 구성원이 모여있다. 구성원은 모두 여성. 부모가 집을 나가버려 하숙집을 관리하는 20살의 유카, 39년 동안 하숙생인 대학교수 사키오(나이 미상), 에로 만화를 그리는 26살의 키즈나, 그리고 새로 하숙을 시작하는 신용금고의 성실한 OL인 34살의 나오코까지. 카레 냄새를 맡던 세 명의 아이 중 두 명은 이곳에서 살게 된다. 오래되어 마루가 무너지기도 하고 산뜻한 느낌은 없지만 ‘해피니스 산차’는 일상으로 채워진 고유의 시간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유카가 만든 식사가 아침과 저녁에 제공되는 훌륭한 서비스 덕분에, 하숙생들은 매회 아침과 저녁에 같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각자의 상황과 고민을 나눈다. 그렇게 서로 식구가 되어가는 듯 보이는 무렵, 각자에게 닥친 사건으로 빈 저녁 식탁이 화면에 비칠 때의 쓸쓸한 느낌은 마치 ‘카레 냄새’가 사라진 풍경 같았다.

10회의 짧은 시리즈를 보고 나면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되어버린다. 한 회, 한 회가 현재 상황과 닿아있는 지점이 있고, 틈틈이 대사도 무척이나 좋을뿐더러 지나치지 않은 일본식의 유머도 곁들여져 있어 무겁지 않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튼튼하고도 잘 짜인, 아름다운 멋진 직조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서사로 매우 잘 만든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계속해서 보게 된다. 추운 세밑과 세초에 여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추천한다.
글. 안난초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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