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혼자 여행하기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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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여행의 모든 걸 가이드북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 유럽 각국의 돈이 유로화로 통합되기도 전의 이야기다. 책에서 골라준 준비물을 착착 챙겨, 책에서 추천해 준 장소만 줄창 돌아보았다. 파리에선 에펠탑, 로마에선 콜로세움. 네덜란드에선? 그야 풍차죠. 숙제하듯 쫓기듯 바쁘게 돌아다녔고, 혓바늘이 대차게 돋았다. 한 인간의 혀에 그렇게 많은 혓바늘이 돋을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넘버 원, 넘버 투 관광지를 모두 정복하려면 어쩔 수 없지.

언제적 이야기인가 싶어 안쓰럽고 우습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각국의 심 카드를 손에 쥔 지금은 뭐가 얼마나 다를까? 인터넷으로 특정 여행지를 검색하면 정형화된 여행 코스가 주루룩(주르륵) 나온다. 이 집에서 이 메뉴를 먹고, 저 집에서 저걸 쇼핑하고, 해 질 무렵엔 미리 어느 포인트를 선점해 석양을 감상하라는 식이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을 최대한 절약해 줄 가성비 만점의 코스. 새로움이 없고 설렘도 없다. 짜릿함이 없고 두근거림도 없다. 처음 가보는 식당 앞에서 일단 스마트폰을 꺼내 별점과 리뷰를 검색한 후 ‘맛집’이라는 이야기가 많으면 겨우 안심하며 들어가는 식이다. 분명 내 발로 들어가긴 했지만, 정말 내가 선택한 것 맞아?

우리에겐 여백이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간을 들여 곰곰이 찬찬히 생각해야 한다. 호불호 목록을 길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를 듣자는 얘기다. 두어 시간쯤 짬이 나는데 미술관에 갈 것인지 쇼핑을 할 것인지, 쇼핑을 선택한다면 큰 쇼핑몰에 갈 것인지 전통시장에 갈 것인지. 고민은 끝이 없다. 내가 나를 알면 그 순간의 우선순위가 빠르게 정해져, 선택도 신속히 할 수 있다. 우선순위는 매 순간 변한다. 생리 주기에 따라, 그날 무릎 컨디션에 따라, 날씨에 따라, 오만 가지 이유로 착착 변한다. 때론 ‘아 됐어, 아무 데도 안 갈래, 그냥 카페에서 차 마시면서 쉬어야지’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로 인해 동행인이 깊게 빡칠 수 있다는 것이며(‘니가 백화점 가쟀잖아 이년아!’) 반대의 경우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인데…….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한다. 나에게 맞는 코스와 나에게 맞는 스케줄을 위해, 나에게 맞는 메뉴 선정과 나에게 맞는 교통수단을 위해 혼자를 선택했다. 혼자 하는 자유여행이란 나를 위해 내 100%를 쓸 기회이지만, 모든 걸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차라리 패키지여행이 나을까? 하지만 그 역시, 혼자일 땐 싱글 차지를 내야 한다. 40대 중반의 비혼여성으로서 나는 어차피 인생의 싱글 차지를 실컷 내면서 살아왔다. 안전을 위해 최대한 대로변에 위치한 집이나 가족 단위 가구가 많은 아파트단지에서 거주한다. 비싸다. 택배나 배달 음식을 받을 땐 저쪽 방에 다른 가족이 있다는 듯 되지도 않은 연기를 한다(“여보오~ 치킨왔어어~”).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세금 꼬박꼬박 내듯 싱글 차지를 뜯기는 사이, 혼자 살기의 경험치가 올라가고 노하우도 쌓인다. 대한민국에서 혼자 살아본 여성이라면, 어지간한 외국 여행도 혼자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한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혼자 여행이라니, 생각밖에 더하겠느냐며 칙칙해서 싫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좋다. 수많은 가능성과 경우의 수 앞에서 ‘어이구야, 뭣부터 해볼까나’라며 나와 상의한다. 내 마음의 소리에 따라 결정한 후엔 혹시 마음이 바뀐 건 아닌지 중간중간 확인하며 업데이트한다. 내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를 좀 더 알아간다. 이런 시간은 소중하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남을 생각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무난하게 끼어 앉을 자리를 찾느라 정작 나와 친해질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2018년 1월엔 작정하고 긴 여행을 떠났다. 내가 나에게 선물한 안식년. 프리랜서는 일하는 대로 돈을 벌지만, 하루라도 쉬면 수입이 끊긴다. 결단이 필요했고, 결국 해냈다. 치앙마이와 포르투, 마드리드, 이스탄불에서 각각 한두 달씩 머무르며 일 년의 반을 보냈다. 생활 같은 여행이자 여행 같은 생활. 나는 그 시간 동안 혼자서 입을 꾹 다물고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글을 썼으며, 무엇보다 많은 생각을 했다. 마흔 중반에서야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을 내 손으로 만들어 누릴 수 있었다.

여백이 있는 여행이 좋다. 여백을 어떻게, 무엇으로, 어떤 속도로 채워갈까 궁리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찬찬히 채운 공간은 온전히 내 것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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