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미쓰백’, ‘국가 부도의 날’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연대

2018.12.13
올해 청룡영화제에서 ‘미쓰백’의 한지민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그는 이지원 감독, 함께 출연한 배우 권소현, 진행을 맡은 김혜수와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을 안다면 이 광경이 당연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성 감독이 연출하고 여성 배우가 원톱 주연을 맡은 ‘미쓰백’은 투자 과정에서 주연을 남자로 바꾸라는 말까지 들었고, 올 초까지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개봉 첫날부터 일부 극장은 ‘퐁당퐁당 상영’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뒷심으로 손익분기점 70만 명을 넘겼다. 이 작품의 성취는 올해 여성 영화 부흥을 위해 분투한 모든 여성들의 승리다.

불씨를 피운 것은 지난 6월 개봉한 ‘허스토리’였다. 위안부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 ‘허스토리’는 관객 수 33만 명이라는 성적만 놓고 보면 실패했지만, ‘허스토리언’을 자처하는 젊은 여성 관객 중심의 지지는 영화계에서 화제가 됐다. 영화 개봉 전 주연배우 김희애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싸움이 최근 미투(#MeToo) 운동의 시작일 수 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무언가를 향한 작은 날갯짓이라도 됐으면 한다”며 ‘허스토리’가 여성 영화로서 가진 의미를 언급한 바 있는데, 그의 바람이 현실화된 것이다. 어떻게든 ‘허스토리’를 살려야 한다며 결집한 이들은 주기적으로 단체 관람(이하 단관) 자리를 마련해 감독 및 배우를 초청한 관객과의 대화(GV) 행사를 수차례 추진했고, 2~30대 여성이 주축이 된 관객층이 거의 모든 좌석을 매진시켰다. 단관 현장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및 민족과 여성 역사관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미쓰백’이 개봉할 무렵에는 SNS를 중심으로 “상영관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허스토리’와 같은 일이 또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인적인 사정상 아동 학대 묘사를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관객은 티켓은 예매하고 실제 관람은 하지 않는, 이른바 ‘영혼 보내기’의 형태로 영화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미쓰백’을 홍보한 플래닛의 김종애 대표는 “사실 첫날 관객 수가 19000명 정도면, 최종 관객 수 20만 명 정도에서 마무리된다고들 생각한다. ‘미쓰백’은 개봉 초기 스크린 수도 적었고 배정된 시간대도 불리했는데, 여성 영화를 지지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준 분들 덕분에 힘을 받았다. 작품 자체의 입소문도 좋아서 손익분기점(70만 명)을 넘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 관객이 여성 영화에 힘을 실어주려는 시도가 몇 백 만 관객을 동원할 만한 파급력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버즈 효과를 만든 중요한 사례가 생겼다.

그렇다면 이 흐름은 김혜수가 원톱 주연을 맡은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5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초반 흥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까. CGV에서 ‘국가부도의 날’을 예매한 여성 관객은 57%로, ‘허스토리’의 77.2%와 ‘미쓰백’의 71.1%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비중이다.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최소 ‘여성 캐릭터 중심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오랜 편견에 반박할 요긴한 증거가 됐다. 올해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손예진, ‘미쓰백’의 한지민 등 많은 배우가 작품 개봉 당시 충무로에서 여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해 언급했고, 이 맥락에서 “전문성이 주가 된 인텔리 여성 캐릭터는 처음 맡아봤다”거나 “다른 여성 배우들과 연대감이 있다”(‘국가부도의 날’ 라운드 인터뷰)는 김혜수의 발언은 ‘국가부도의 날’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여성 배우 중심 영화가 제작되고 개봉하기까지 분투한 제작자와 배우, 관객이 힘을 합친 결과가 ‘허스토리’, ‘미쓰백’에 이어 ‘국가부도의 날’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한 마케터들은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 홍보 관계자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이나 배우가 이슈가 되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곧 스코어를 결정짓는다고는 판단하지는 않지만, ‘미쓰백’의 성공을 보면서 이 분들이 마냥 얕은 층은 아님을, 생각보다는 많다는 걸 확인했다”고 언급했다.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 백래시도 함께 고려하는 분위기다. 영화 개봉 즈음 인터뷰를 진행한 후 종종 소속사 관계자들이 최근 들어 젠더 문제와 연관된 내용을 기사에 넣지 말아달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텍스트로만 전달되면 ‘여혐’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연락부터, 모 페미니즘 교양서를 읽었다고 말한 여자 배우 소속사로부터 “이상한 공격을 받을까봐 너무 걱정된다”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과 배우, 제작자와 마케터에 이르기까지 여성 연대의 흐름을 아예 무시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은 중요하다. 특히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영화 섹션에서 상영된 10편의 작품 중 5편이 여성 감독 영화이었고, 여성 서사도 눈에 띠게 늘었다. 매해 남녀 배우 1명씩 수여 되던 올해의 배우상은 이례적으로 두 여성 배우, 최희서와 이주영에게 돌아갔다. 영화제에서 발굴된 재능 있는 여성 감독과 배우들이 상업 영화에도 진출하고, 여성이 여성에게 지지를 보내는 순간이 더 자주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영화를 매개로 한 여성의 연대가 그간 남성들 중심의 작품을 만들던 한국 영화 산업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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