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리티

김해숙의 존재감

2018.11.21
tvN ‘나인룸’의 주인공은 희대의 악녀이자 살인자로 몰려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채 살아온 여성 사형수 장화사, 그리고 인격적 결함이 있는 여성 변호사 을지해이다. 두 여성의 영혼이 서로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오고, 각자의 복수와 야망이 교차하는 이 복잡한 드라마에서 김해숙은 김희선과 함께 말 그대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해낸다. 장화사로서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마음속에 슬픔과 한을 꾹꾹 눌러 담은 연기를, 을지해이와 영혼이 바뀌었을 때는 콧소리 섞인 목소리와 새침한 표정으로 우아하면서도 냉혹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중간중간 을지해이의 남자친구인 기유진(김영광)과 멜로를 펼치기도 하고, 진짜 악인 추영배(이경영)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나인룸’은 김해숙의 연기 종합선물세트 같은 드라마다.

언제나 눈물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 자식에게라면 모든 것을 다 내어줄 것 같은 엄마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김해숙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돼 있다. KBS ‘부모님 전상서’에 출연했을 때는 ‘우리네 어머니상’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해숙에 관한 기사에는 ‘국민 엄마’라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라고 하면 지고지순한 이미지의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상징적이고요. 하지만 엄마는 상징이 아니에요. 직업도, 표현 방법도 여럿이죠.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릇된 사랑일 수도 있잖아요. 거기서 엄마도 하나의 장르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라는 그의 말처럼, 김해숙이 연기한 인물들은 ‘엄마’라는 분류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반드시 자식 뒷바라지에 고생하며 살아가는 애처로운 엄마가 아니더라도, SBS ‘피노키오’의 권력을 가진 거만하고 악랄한 박로사, 영화 ‘박쥐’의 괴이하고 섬뜩한 라 여사, ‘사도’의 인원왕후 등 대부분 누군가의 엄마이기 이전에 명확한 캐릭터를 가진 여성들이다. 아주 잠깐 등장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신과 함께-죄와 벌’의 초강대왕이나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허스토리’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로맨스와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 ‘도둑들’의 씹던 껌처럼, 엄마의 카테고리 바깥에서도 김해숙은 흐릿해지는 법이 없다. 엄마냐 아니냐, 영화냐 드라마냐, 판타지냐 시대극이냐를 떠나서 보는 이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어야 하는 인물들은 김해숙을 만나 더욱 또렷해진다.

‘나인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해숙은 “나는 여전히 새로운 캐릭터에 목마르다. 연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건 ‘변신’이라기보다는 열망이다”라고 말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여성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시나리오가 남성 배우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한편, 더 새로운 역할과 더 많은 작품에 대한 갈증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저 자신을 부수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커요. 누아르도 찍어보고 싶고 다 해보고 싶어요. 남자만 ‘조폭’ 있나요? 여자 조폭도 있잖아요. 여자 대통령도 있고요. 메릴 스트립을 보면 엄마 캐릭터도 많이 하지만 록커가 되기도 하고요. ‘007’ 시리즈 같은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다들 다작이라고 하지만 난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제 꿈이 여자 이경영이다.” 연기를 시작한 지 44년째, 김해숙은 여전히 보여주고 싶은 게 많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말은 이럴 때야말로 필요한 응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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