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낙태, 여행.

2018.10.05
©봄알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는지 모를 우리의 여행은 어쩌다 떠올랐으며 섣불리 결정되었다. 봄알람 여름휴가 마지막 날이던 2017년 8월의 어느 밤, 호랑이가 그려진 보드카를 나누어 마시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유럽 낙태 여행’ 서문 중) 겨울휴가를 유럽의 따뜻한 섬에서, 기왕이면 맛도 좋고 볕도 좋은 시칠리아 섬에서 보내자는 제안이 어느새 유럽 대륙을 돌면서 낙태권 활동가들을 만나고 와서 책을 쓰자는 기획으로 탈바꿈했다. 네 명이 함께 책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고, 먼 곳으로 떠나는 만큼 기존의 책들보다는 오랜 기간 준비가 필요했고, 조금 더 많은 제작비를 먼저 마련해야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랬고, 성공 여부가 순전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데다 몇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활동가들의 환대에 순전히 달려있다는 점도 그랬다. 기획 준비를 시작하기 전, 우리가 아는 유럽의 낙태권 활동가는 여성인권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Vessel)’에 나오는 위민온웹의 레베카 곰퍼츠 단 한 명이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마음이 울렁울렁거렸다. 밝은 얼굴로 받아주고 말과 손짓 하나하나마다 에너지를 내뿜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본인과 친구들이 낙태했던 이야기, 그러면서 겪었던 것들, 해당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악랄했고 극복되거나 되지 못했는지, 지금은 어떠한 문제들이 남아있는지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지역과 상황도 다르지만 사람도 모두 다른 만큼 각자 다른 동기와 감정을 주되게 갖고 있는 것도 재밌었다. 아일랜드의 리타는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에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폴란드의 우르술라는 분노가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고 했고, 루마니아의 드라기치는 연대가 열쇠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화가 나서, 어느 날은 기뻐서, 어느 날은 벅차서, 여러가지 이유로 눈물이 자꾸 났는데 기저에는 공명감이 있었다. 먼 곳의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페미니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금방 거리가 좁혀졌다. 선물이나 밥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표현하고 느꼈다. 그 마음의 거리의 격차가 확 줄어드는 속도에서 마음이 급히 수축되면서 울음이 나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행을 마치고 원고를 쓰고 책이 나왔다. 마침 레베카가 한국에 오기로 해서 그 날짜에 맞춰 책을 마무리하느라 갈때 준비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황급히 준비하고 마쳤다. 레베카와 레베카의 딸과 함께 북콘서트가 끝나고 곧바로 광화문 광장의 낙태죄폐지 집회에 갔다. 낙태 경험에 대한 말하기와 한국의 낙태죄가 가진 모순과 위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수백명의 여성들이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함께 걸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우리가 만들었던 다른 책들보다 생각보다 반응이 없었다. 네덜란드 게스트하우스에서 낙태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나눴던 적이 있는데, 누군가에겐 가능한 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버릴 것, 누군가에겐 이성애섹스를 하지 않는 본인의 삶과는 별로 관련 없고 사실 좀 낡은, 심지어는 촌스러운 이슈처럼 느껴졌던 것 등이었다. 낙태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학습된 거부감이 너무 커서 사실은 똑바로 그 두 글자를 쳐다보기 조차도 어려운 분위기인 것이 사실이다. 북콘서트를 하며 책을 파는 부스를 지나치는 사람들도 낙태라는 단어를 보며 판매를 도와주는 친구에게 계속 시비를 걸고는 했다. 경멸하는 표정으로 “낙태?”라고 괜히 읊조리고 사람들은 몇몇 있었고, “저기요. 낙태여행이 뭔데요?”라고 굳이 말을 걸고는 “유럽에서 낙태권 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한 여행을 담은 책인데요, 한 번 보시겠어요?”라는 답을 듣자 “싫어요! 제가 왜요!”라고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책이 이슈화되기 시작한 것은 책이 서점에서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모 신문사의 기자님을 통해서 무슨 대형서점에 갔는데 책이 자꾸 없어진다고 고충을 토로하더라, 그 자리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 없더라, 가끔은 표지가 구겨져 우글거리더라, 또 다른 어떤 대형서점에는 물류창고에만 있고 서점에는 재고가 없더라, 하는 식이었다. 직접 문의에 서점 직원은 그런 일이 없다고 답했지만 트위터에 증언(?)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이런 말들이 모이자 그렇다면 책을 사주자! 하는 사람들이 트위터에 보였다. “유럽”, “낙태”, “여행”이라는 단어 세 개 다 남자들이 끔찍히 싫어하는 단어라는 말을 하자 남자들이 기겁하는 또 다른 단어인 “명품”도 넣어서 “유럽명품낙태여행”이라고 지었어야 한다는 유쾌한 말들도 있었다. 이것까지 소문나진 않았지만, ‘유럽 낙태 여행’은 한국의 낙태죄를 폐지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였다. 읽은 사람들은 다들 재밌다고 하는데 읽은 사람이 아직 그렇게 많지 않은 이 책이 널리 가닿고 낙태죄 폐지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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