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백소용의 ‘비밀의 숲’, 한송이의 ‘프로즌 플래닛’, 손기은의 ‘필이 좋은 여행, 한입만!’

2018.08.31
비밀의 숲 (넷플릭스, VOD)

어렸을 때 받은 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검사 황시목(조승우)이 검찰 내부의 비리 세력을 도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여기에 경찰대학 출신의 용산경찰서 소속 강력계 여경 한여진(배두나)이 지원한다. 이 내용만이 공개됐을 때, ‘비밀의 숲’은 감정을 제대로 못 느끼는 남자 주인공 설정을 활용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의 숲’은 이 관계를 뒤집어 주연 배우 간에 별다른 애정 관계 없이 사건이 진행됐다. 또한 명확한 선악의 구분도 없었다.

물론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가져가는 드라마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주인공의 설정이 애정이 아닌 선악 구분에 적용되면서 ‘비밀의 숲’은 기존 드라마의 전형적인 전개들을 조금씩 다 비껴간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사건에 뛰어들지만 그들은 일만 열심히 하고, 감정이 없는 주인공은 선한 의도나 가련한 처지의 인간이 저지른 악행 등에 대해 동정을 느끼지 않은 채 오직 사건의 진실에만 초점을 맞춘다. 때로는 무자비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행하더라도 그것이 정의에 가깝다면 폄훼하지 않는, 말 그대로 기계적 감성의 소유자가 기존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다른 방식으로 선과 나온 순간은 곱씹을수록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신선한 쾌감을 준다. 방영 당시 이 작품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비교되거나 작품이 가진 의미 등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비밀의 숲’은 독특한 캐릭터로 장르의 전형을 뒤튼,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수사물이기도 하다.   
글. 백소용 (마블/DC 코믹스 한국 편집자)

프로즌 플래닛 (넷플릭스)

걸어서 3분 거리의 카페로 피신하는 것조차 주저되는 날씨의 연속이었다. 기록적인 폭염에 살아남기 위해 에어컨을 24시간 켜둔 채 집에서 은둔했다. 생존을 위해 전기세를 포기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겪어본 적 없는 누진세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나는 냉방에서 제습으로 설정을 바꾸고 희망기온을 28도까지 높였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켜고, 가장 추워 보이는 영상을 골랐다. BBC Earth 제작의 다큐멘터리 ‘프로즌 플래닛’은 제목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프로즌 플래닛’은 극지방에 서식하는 동물을 계절 별로 보여주는 6부작 다큐멘터리다. 더운 날씨를 떨쳐내는 것 외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극지방에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심지어 매우 귀여운 동물이 많다는 점이다. 보송보송한 회색 털을 가진 새끼 황제펭귄과 북극곰, 물범, 벨루가 등 SNS에서 ‘짤’로만 보던 동물이 총출동한다. 귀여운 동물을 내세운 넷플릭스의 다른 작품보다 귀여움의 수치가 훨씬 높다. 귀여움이 이 다큐멘터리의 장점 지분에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계절 변화에 따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움직이는 동물들을 보고 있자면 대자연 앞에 느껴지는 형용하기 어려운 짠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물론 큰 부리 바다오리의 '귀염뽀짝'한 첫 비행 도전과 실패마저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북극여우에 잡아먹히는 장면을 보면서 '아!'하고 탄성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폭염과 태풍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요즘이다. 에어컨 ‘제습’ 모드와 함께 귀엽고 시원한 걸 보면서 바깥 날씨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그리고 역시, 귀여운 게 최고다.
글. 한송이(방송작가)

필이 좋은 여행, 한입만! (넷플릭스)

이 시리즈의 한글 제목을 떠올리고 좋아했을 누군가에겐 미안하지만, 몰아보기를 시작할지 말지 검지를 굴려가며 고민할 때 제목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꼰대개그’스러운 작명에 중년 남자가 포스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터라 막상 클릭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리즈의 골자는 호스트인 필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음식과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는, 고전처럼 익숙한 그 내용이니…. 처음엔 여행지 풍경이나 볼까, 라는 생각으로 클릭을 했다가 어느새 시즌 1의 끝을 보고야 말았다. (최근에 시즌 2가 릴리즈됐다.)

이 시리즈는 가벼워서 끌리는 쪽이다.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이 기립을 부르는 초반의 감동에 비해 이제 좀 끈적하고 느릿하게 느껴진다면, 머릿속을 가열차게 굴려가며 데이비드 챙을 따라가느라 다음 편 진출 속도가 좀 더뎠던 ‘어글리 딜리셔스’를 한 편 정도 남겨두고 있다면, 백종원의 혼잣말과 감탄사에 의존하는 ‘스트리트 푸드파이터’가 어딘지 심심하게 느껴졌다면, 이 시리즈를 볼 때다. 기나긴 코스 중에 나오는 레몬 셔벗처럼 가볍게 환기가 되는 다큐멘터리니까.

시리즈의 스타일을 규정짓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필은 말이 풍성한 호스트다. 쉼없이 감탄하고, 농담을 던지고, 주변인과 인사하고, 밥을 먹으며 대화한다. 리스본, 뉴올리언스, 더블린, 텔아비브, 호찌민, 코펜하겐 등 미식의 이야기거리가 풍성한 도시를 찾아가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다. 그 지역 미식의 아이콘을 만나 밥 먹으며 수다떨고, 지나가다 들른 가게 주인과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간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여행’과 ‘음식’이라는 주제 외에도 개인적으로는 ‘밥상머리 대화법’을 체득하는 교재가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식사를 하며 ‘스몰토크’를 자연스럽게 하는 걸 보거나, 필의 쓸데없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작은 말들에 재미를 느끼는 건 그 부분이 늘 목말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맛있는 음식인데 구체적으로 뭐가 맛있는지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의 눙치는 영어 감탄사를 다채롭게 알게되는 것도 잔재미 중 하나다.

말로 엮어가는 미식 여행 다큐멘터리이다보니, 영어가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즐거운 참여가 가능하다는 점, 그로 인해 필의 시각과 경험의 폭이 어쩔 수 없이 제한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아쉬움이지만 기대만큼 훌륭한 여행지 풍경, 공들여 찍은 음식 영상, 흥미로운 미식 정보, 깨알 같은 웃음거리가 기본 이상이다. 휴가를 다녀온 뒤에 다음 휴가까지 기다리기가 힘에 부칠 때 정신을 기대기 좋은 시리즈다.
글. 손기은(‘GQ KOREA’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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