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여자들│① 그들의 삶에 생긴 변화

2018.08.28
Olive ‘밥블레스 유’의 출연진, 최화정, 이영자, 송은이, 김숙의 삶은 시끌벅적하고 즐겁다. 음식 예찬으로 시작된 대화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어느새 자신들의 지난 연애사를 돌아보는 수다로 이어지다가 가끔은 서로의 머리를 쥐어박는 듯한 시늉을 하는 장난으로 끝난다.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조차 “청춘의 멘토”, “인생의 방향 제시”같이 거창한 키워드가 끼어들 틈은 없다. 대신 그들은 TV를 통해 59세, 51세, 46세, 44세 미혼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결혼 제도에 속하지 않고서 돈은 내가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해서 버는 데다 일이 힘들어도 의지할 친구들이 있는 든든한 여성들의 모습. 네 사람의 삶은 소위 ‘아줌마/애 엄마’로도, 거창하고 우아한 ‘골드미스’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원하는 대로 잘, 즐겁게 살고 있는 여성들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성 정책의 일환으로 노동 문제를 포함해 인권이나 교육권 문제 대신 출산 지도를 제시한다. 정부나 각 지자체가 여성의 일생에 관해 정해놓은 틀은 이미 결혼과 육아에만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정작 TV 속 여성들의 모습은 변화했다. 연예인들이 술상 앞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콘셉트의 tvN ‘인생술집’이나 언니와 동생 관계로 연결되는 jtbc4 ‘나만 알고 싶은 비밀언니’에 나온 대부분의 여성들은 연애나 결혼 이야기보다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성격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에 집중한다. 배우 채정안은 회사에서 만들어낸 신비주의 콘셉트를 부정하며 “회사 사람들한테 관계자들 만날 때 술병에 (자신의 얼굴이 프린트된) 이 스티커를 붙이고 나가라고 말했다”고 직접 만든 스티커가 붙은 소주병을 선보였다. 남성 출연자들이 당황할 정도로 성적 취향에 관한 질문을 노골적으로 던지기도 했다. ‘나만 알고 싶은 비밀언니’에 출연한 황보와 남보라는 낮술을 즐기며 10년 전에 만났을 때와 지금 달라진 서로의 모습을 되짚으며 우정을 나눈다. 걸그룹 소녀시대 효연과 마마무 휘인은 침대 위에 배달 음식을 올려놓고 TV 속 자신들의 과거 모습을 보며 낄낄댄다.

여성들의 대화에는 여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연애나 결혼에 관한 얘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시각을 부정하기도 한다. 최근 영화 ‘너의 결혼식’의 개봉을 앞두고 여주인공 환승희 역을 맡은 박보영은 인터뷰에서 “여자 시선으로 바라보는 멜로가 나왔으면 좋겠다. '더 아련하게 해주세요. 붙잡고 싶게 해주세요.' 이런 요청을 받는데 쉽지 않았다.”(‘엑스포츠뉴스’)고 말했다. 그는 ‘힘쎈여자 도봉순’을 한 뒤에 “내게 있어서 달라진 건 없다. 나도 봉순이처럼 연약하지만은 않은, 승희처럼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성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이건 운명이다 싶고 발버둥쳐봤자 안 된다는걸 깨달았다. 귀여운 이미지뿐 아니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렵다.”며 답답해했다. 여성 연예인들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씌워진 사회적 편견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란 어렵다. 효연은 휘인에게 “너 생각보다 털털하다”고 말하거나, 한채영과 선미와 만난 자리에서 “여자들이 모이면 다이어트 얘기”라며 여성에게 씌워진 사회적 편견을 스스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그들 안에서 나온다. 지금 효연은 걸그룹 이미지를 깨고 나와 EDM을 기반으로 한 디제잉을 하며 즐거워한다. 선미는 여성 연예인에게 가해지는 악플을 신경 쓰지만, 꿋꿋이 자신의 콘셉트에 관해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PPT를 만들어 회사 직원들에게 보낸다. ‘가시나’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돈을 많이 벌고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다는 게 잘 사는 사람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결혼과 연애, 육아가 잘 사는 여성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했더라도 조신한 아내의 역할 대신 음식은 시켜 먹고,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 작사가 겸 방송인 김이나는 웹 예능 ‘쎈 마이웨이’에 출연해 “결혼이 좋냐고 물으면 나도 모다. 네가 누구랑 결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결혼이 좋은 건 나와 이 사람의 합이 좋은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10년 넘게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박소현은 ‘아이돌 덕질’을 하기 위해 소개팅 일정을 미루기도 한다. 그의 ‘덕질’은 50대까지 그가 자신의 삶을 경쾌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임과 동시에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이다. “예전에는 솔로 가수들 인터뷰를 하면 앨범을 다 듣고 갔다. 지금은 솔로 가수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아이돌 가수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진화를 한 것”이다. 그는 “13명이 나왔는데 이름도 모르고 있고, 포지션도 모르고 있고 그러면 정말 실례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DJ가 정말 싫었다.” 이 말을 들은 슈퍼주니어 김희철은 “내가 그 아이돌이라면 누나를 만나는 게 너무 좋고 고마울 것 같다.”고 말한다. 남자를 만날 수도 있고 결혼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나만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있다. 지금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 사는 여성들 모두가 자란 환경이 다르고, 나이도 다르며, 취미도 다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동안 여성의 삶은 대부분 미혼/기혼, 예쁘다/못생겼다, 어리다/나이가 많다 등의 기준에 의해 한쪽은 좋은 삶이며 다른 한쪽은 불행하거나 하자가 있는 삶으로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 TV에는 그동안 한국 여성을 가뒀던 이분법적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허스토리’는 개봉관이 없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대, 30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단체 관람을 추진해 관객 숫자를 33만까지 끌어올렸다. 위안부 여성을 연기한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노년의 배우들은 이제 중년이 된 김희애와 함께 GV에서 젊은 여성 관객들과 사진을 찍고 악수를 했다. 앞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78세 나문희가 30대 배우 이제훈과 짝을 이뤄 위안부의 아픔을 전하기도 했다. 20대가 지나면 엄마 역할에 그치던 여성 배우들은 중장년과 노년에 이르러 여성이 말해야만 설득력을 갖는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사회의 의제로 올린다. “성격의 차이인데 난 맞춰주는 게 편하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안 하려고 한다. 사랑뿐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더 똑 부러지고 싶다.”(‘엑스포츠뉴스’) 박보영처럼 29세에 당장 내 삶의 형태를 바꾸겠다고 선언해도 된다. 그게 언제가 되든 간에. 20대도, 30대도, 혹은 70대라도 된다. 말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게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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