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말 좀 들어주는 남자를 찾아서

2018.08.27
©Shutterstock
소개팅을 하게 된 금요일 저녁. 희정 씨는 진우 씨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러 간다. 진우 씨가 묻는다.

진우: 주로 어떤 책을 보세요?
희정: 저는 소설을 좋아해요.
진우: 어떤 소설이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요?
희정: A를 진짜 좋아해요.
진우: A를 아세요?! 오호. (이하 A의 소설 제목 나열) 그리고요?
희정: B도 좋아하고요.
진우: B도 아시는구나. B도 좋은 작가죠. (이하 B의 소설 제목 나열) (이하 자기가 B의 소설들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설명) (이하 B의 소설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 그리고 또요?
희정: 음 예전엔 C가 쓴 소설도 많이 읽었죠…….
진우: C! (이하 C의 소설 제목 나열) (이하 C의 소설에 대한 자기의 견해) (이하 C의 소설의 한국어 번역에 대한 비판) (이하 C의 생애 전반과 괴팍한 성격 및 그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엇갈린 평가)

이야기하는 내내 진우 씨는 몹시 뿌듯한 표정이다. 자기가 잘 아는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쁜 것 같다. 그러나 희정 씨는 지금 이 순간 인터넷 강의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진우 씨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희정 씨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죠’, ‘맞아요’ 같은 추임새를 넣어 자기도 아는 얘기라는 사인을 몇 번 보냈으나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아 곧 그만둔다. 그렇게 진우 씨는 희정 씨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가 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만 어필한다. 이윽고 희정 씨는 손을 들어 맥주를 추가 주문한다. 진우 씨가 말한다.
 
“와, 술을 잘 드시나 봐요!”

희정 씨는 그가 혼자 이야기하는 동안 입이 심심해서 맥주를 빨리 마셨을 뿐이다. 그날 저녁 대화는 계속 그런 패턴으로 진행되고 희정 씨는 맥주 500cc를 네 잔 비운다. 희정 씨는 진우 씨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그 작가들의 생애가 어땠는지, 어떤 영화들을 보았는지, 어떤 감독들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우리나라 극장들의 문제점이 뭔지, 세상에 성격이 좋지 않은 예술가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안주로 나온 수제 소시지의 종류와 제조 방법, 소시지의 역사에 대해 들었다.

이윽고 일어설 시간이 되어 다음 만남을 애매하게 기약하며 귀가한 다음 날, 주선자에게서 카톡이 온다.

- 어제 어땠어?? 진우 씨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았대.

대화가 잘 통했다고? 잠시 당황하던 희정 씨는 이 상황을 어디선가 미리 겪어본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깨닫는다. 회식 때면 부하 직원들을 앞에 두고 혼자 떠들기 바쁜 부장이 이렇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회식도 가끔 하면서 서로 대화도 많이 해야 직원들끼리 돈독해지는 거야.”

엊저녁의 일을 주선자에게 털어놓으며 ‘그래서 나는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자 주선자가 답장한다.

- ㅋㅋㅋ 고생했어. 근데 남자들은 자기가 아는 걸 말하길 좋아하잖아. 그렇게 기를 살려줘야 한다더라고.

이런 말도 이미 어디서 여러 번 들은 것 같다. 언젠가 ‘남자와 대화할 때는 내가 아는 얘기가 나와도 모르는 척한다. 그러면 남자들이 신나서 계속 이야기한다. 처음 만난 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애프터 신청이 온다’던 친구가 있었다. 어떤 게시판에서는 이런 태도를 ‘효과 좋은 연애 팁’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그 글에는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들이 싫어하죠. 똑똑한 여자보다 현명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잖아요’라는 댓글도 달렸던 것 같다.

희정 씨는 생각한다. 그럼 내가 어제 잘 대응한 건가? 주선자에게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았다고 했다니 아마 곧 애프터 신청이 오겠구나. 그런데 다시 만나면 그때도 어제 같지 않을까? 그때도 어제처럼 진우 씨가 하는 얘길 가만히 듣고 있으면 되는 건가? 그러다가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만나는 내내 이런 식의 대화가 되풀이되는 걸까? 이런 건 사실 별거 아닌가? 이런 부분은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고 다른 좋은 점에 만족하면 되는 건데 내가 지금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공을 넘기면 상대방이 받아서 이쪽으로 넘기고, 다시 공을 넘기면 상대방이 넘기고, 그렇게 공놀이하듯 대화를 주고받는 재미를 느꼈던 게 너무 오래된 일 같다. 희정 씨도 언젠가 그런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와 만나면 카페에 마주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그가 말하는 동안 희정 씨가 열심히 경청해준 것처럼 그도 희정 씨가 하는 말을 경청해주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둘 중에서 누가 더 많은 것을 아는지 결판을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희정 씨가 알고 있어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희정 씨는 ‘남자 기를 살려줄 줄 아는 여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그와는 그냥 말을 주고받을 뿐인데도 더없이 묘하고 짜릿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는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을 거라고 희정 씨는 생각한다.

토요일의 늦은 아침 식사를 한 희정 씨는 동네 산책을 나선다. 산책길을 오르다가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저쪽에 앉은 노부부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여든은 훌쩍 넘겼을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당신은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평생 그랬어!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목록

SPECIAL

image 걸크러시 콘셉트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