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정세랑의 ‘원헌드레드’, dcdc의 ‘굿플레이스’, 곽재식의 ‘무인시대’

2018.08.10
‘원헌드레드’

많은 사람이 스티븐 킹의 추천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꽤 신뢰하는 편이다. 스티븐 킹이 몇 년에 걸쳐 ‘원헌드레드(the 100)’가 흥미진진하다고 트위터에 쓴 걸 보고 넷플릭스에서 몰아보았는데, 정말이지 취향저격이었다. 이후로 누가 스티븐 킹이 추천을 남발한다고 놀리려고 하면 대신 항변해주고 싶어질 정도다.

지구가 방사능으로 오염된 근미래, 우주 정거장으로 탈출해 겨우 살아남은 한 줌의 인류, 그중에서도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다. 우주 정거장의 자원은 너무나 모자라고, 규칙을 어긴 자는 가차 없이 에어록 바깥으로 던져진다. 각자의 사연과 함께 구속된 청소년 백 명은, 사형 대신 지표가 살 만해졌는지 시험 삼아 지구로 돌려보내지는데 바로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지만, 끝없이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생존 앞에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구의 생명을 우선으로 해야 하나? 양쪽 다 공동체를 위해 일리 있는 주장을 하지만 결코 공존할 수 없을 때는? 게다가 이 질문들은 시즌마다 신선하게 갱신된다. 입체적인 성격의 여성 리더인 클라크와, 클라크와 비슷한 선택을 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벨아미의 케미는 마음이 저릴 정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애정이 아닌 우정으로 푼 것도 신의 한 수였다.
글. 정세랑(작가)

‘굿 플레이스’

엘리너 셸스트롭(크리스틴 벨)은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선한 이들만이 갈 수 있는 사후세계 굿 플레이스의 주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행정 오류로 인한 결과일 뿐, 그가 본디 배정된 곳은 비명과 절망으로 가득 찬 배드 플레이스였다. 엘리너는 굿 플레이스의 주민으로 남기 위해 천사와 천사처럼 착한 사람들 앞에서 천사처럼 착한 사람을 연기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한다.

매혹적인 설정은 아니다.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천국 혹은 지옥이라는 개념은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에게조차 모순덩어리로 보였으며, 일요일에 성당을 가지 않고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 논파해야 할 과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굿 플레이스’는 나이브한 종교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사후세계의 낙원이 갖는 모순점에 눈감지 않고 되레 그 아이러니를 한껏 조롱한다. 그러면서도 위악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인가에 대해 멈춤 없이 탐구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분명 고리타분한 명제다. 그럼에도 이 명제를 증명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유쾌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

“죽기엔 너무 젊고 어린이 세트를 먹기엔 너무 늙었다.” 시즌 2에서 스쳐 지나가듯 나온 이 대사만큼 엘리너 셸스트롭을 잘 설명하는 문구는 없는 것 같다. 그는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지 않는 덜 자란 어른이다. 동시에 굿 플레이스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모순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자란 아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철부지가 조금씩 성장하며 ‘죽어도 좋을’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작품의 의의를 떠나 ‘굿 플레이스’가 주말에 몰아보기 좋은 작품인 이유 셋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하나. 시즌 1과 시즌 2의 분위기가 달라 쉬이 질리지 않는다. 둘. 현재까지 나온 시즌은 총 2개뿐이며 한 편의 분량도 20분 내외라 정주행에 부담이 없다. 셋. 시즌 3가 9월에 시작한다. 지금 정주행을 마치면 “그래서 다음 시즌은 언제 나오는데?!”라는 절망이 아닌 “한 달만 견디면 다음 시즌이다!”라는 두근거림만 즐길 수 있다.
글. dcdc(작가)

‘무인시대’

2004년에 방영된 KBS ‘무인시대’는 2000년 이후 방영된 모든 사극 중에서 지금까지도 최고로 꼽는다. 1170년에서 1219년까지 대략 50년간 장군과 군인 들이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를 다루는 이 사극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주인공이 대부분 다 악당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전체를 꿰뚫는 한 명의 주인공 없이, 조정을 장악한 우두머리가 바뀌는 데 따라 이야기도 휙휙 분위기를 바꿔가며 중심이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이 사극은, 주인공은 성실하고 끈질기게 노력하며 선량하고, 반대로 그런 주인공을 탄압하는 야비하고 사악하고 이기적인 악당이 있다는 틀에 박힌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온통 역적에 거짓말쟁이들이 그득그득한 판인데 바로 그 작자들이 뻔뻔스럽게도 대단한 영웅호걸들인 양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고려 조정을 바로 세우고 정의를 위해 남의 목을 친다는 이야기를 거창하게 주절거리고 있는 강렬한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이 이야기야말로 바로 역사와 정치의 핵심을 묘파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배역들의 연기도 대단히 훌륭하다. 보통 연속극들이 그 무렵의 인기 배우 한 사람을 핵심으로 내세우는 것과 달리, ‘무인시대’는 경험이 많고 연기력이 뛰어난 중견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주인공은 없고 악당들만 득실거리는 이 이야기에서는 이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의 역사 속 무신 집권자를 연기한 서인석, 김흥기, 이덕화, 김갑수 배우들은 고려시대 그 사람들의 원래 모습 그 자체로 보이는 느낌이고 의종, 명종 같은 힘없는 임금을 연기한 김규철, 김병세 배우들의 모습도 매우 빼어나다.

전체가 158부작이나 되는 이야기이니 요즘 감각에는 한 3분의 1쯤을 쳐내고 20부작 한 시즌으로 다섯 시즌짜리 이야기로 재편집하면 더 박진감 넘치기는 할 것이다. 역사 속 집권자들이 바뀜에 따라서 등장인물들도 뭉테기로 바뀌어가니 거기에 맞춰 시즌으로 나눠 꾸미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긴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연결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몰아 보기에 나쁘지는 않다. 이미 한 회가 멀다 하고 반란, 모반, 정변이 일어나는 이야기다. 역사 속 인물들의 죄상을 다룰 때에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장면을 넣거나 어물쩍 넘어가는 것 없이, 그냥 그 인간이 그 점에서는 비열해서 그랬다고 간명하게 쿡쿡 찌르고 지나가는 장면들은 언제 봐도 신선하다.
글. 곽재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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