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This is it

‘미스터 선샤인’, 결국 김은숙의 드라마

2018.07.25
tvN ‘미스터 선샤인’은 구한말, 정확히는 개화기 이후 일제 강점기 전까지를 다루는 중이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이 시대는 미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이 조선을 위협하지만, 조선인에게 새로운 기회로 묘사된다. 노비를 쫓던 추노꾼들은 전당포를 차리고, 언어에 능한 이들은 역관이 되어 출세길을 찾기도 한다. 고애신(김태리)은 이 시대이기에 존재 가능한 여성이다. 그는 개화의 영향을 받아 의병을 지원하고, 사격을 배우면서 체력을 기르며, 평민 여성과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애기씨’로 대접받는 조선 최고 명문가의 자식이다. 아직 망하지 않은 조선은 고애신의 신분과 권력을 보장한다. 권력, 무력, 지성을 모두 갖춘, 이른바 ‘먼치킨’이라 해도 좋을 여주인공의 탄생이다.

고애신이 집안끼리 정한 정혼자 김희성(변요한)을 글로리 호텔에서 꾸짖는 장면은 고애신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준다. 조선에서 여성이 공개된 장소에서 조선 최고 부잣집 자식을 혼낼 수 있다. 똑똑하고, 당당하며, 힘을 가진 여성의 시대. 고애신의 어머니는 의병 남편을 지원하며 아이를 키웠다. 고애신을 기른 큰어머니 조씨 부인(김나운)은 명궁이지만 의병이나 군인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식 세대의 여성은 능력과 기개를 펼칠 수 있다. ‘미스터 선샤인’이 그리는 구한말이다.

유진 초이(이병헌)는 미국 헌병대 장교고, 구동매(유연석)는 일본 폭력조직 무신회의 한성 지부장이다. 그들은 조선에서 손대기 어려운 권력 또는 폭력을 사용할 힘을 가졌다. 일본에서 유학을 배운 김희성은 재력과 함께 다정한 성격을 가졌다. 다른 성격과 매력을 가진 세 남자가 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고애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유진 초이가 고애신을 처음 만난 장소는 같은 대상을 암살하려는 곳이었고, 구동매에게 고애신은 여전히 ‘애기씨’다. 재산이라면 고애신의 가문도 김희성의 가문만큼 많다. 김희성은 고애신에게 약해 보인다는 평가나 듣는 신세다. 고애신은 암살을 위해 한성의 집 지붕 사이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를 두고 세 남자가 신경전을 벌인다. SBS ‘파리의 연인’ 시절부터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손을 잡아끌고 “애기야, 가자”라고 하던 김은숙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고애신이 일을 벌리고, 숨기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미스터 선샤인’은 나라를 둘러싼 시대의 무거운 공기를, 싸울 자유를 획득한 여자의 에너지로 걷어낸다. 호텔 글로리의 주인 쿠도 히나(김민정)는 남자를 상대로 펜싱을 연습하고, 고애신의 사촌 고애순(박아인)은 도박에 빠져 있다. 멋있는 것이든 코믹한 것이든, 과거에는 남자 캐릭터가 주로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들의 개성은 나라가 망해가는 이야기에 로맨스가 가능할 만큼의 밝기를 부여한다. 김은숙 작가는 ‘미스터 선샤인’에서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멋진 남자 캐릭터의 많은 부분을 여성 캐릭터에게 부여하고, 여주인공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그러나 구한말의 끝에는 비극이 예정돼 있다. 조선이 망하면 고애신은 의병과 조선 최고 명문가의 신분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고애신이 아무리 총을 잘 쏜다 해도 강대국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미스터 선샤인’은 고애신을 시대의 비극 앞으로 가져다 놓는 것을 유예한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조선을 놓고 경쟁 중이지만, 고애신은 첫 암살 사건 이후 6회까지 새로운 임무를 맡지 못한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구한말 조선 여성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유진 초이나 구동매처럼 두 나라의 권력과 맞닿아 있는 이들이 그것을 쥐고 있다. 유진 초이는 미국, 일본, 조선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할 로청은행 예치금 증서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 고애신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알파벳을 외우고, 유진 초이를 통해 미국 총에 대해 배운다.

고애신은 의병이 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체력 훈련을 소화했다. 뛰어난 두뇌와 집안의 자금력도 있다. 사격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정보 수집과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애신은 유진 초이를 만난 뒤에야 영어를 배우고, 국제 정세에 대해 알고는 싶어 하지만 정보를 접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미군의 총을 훔친 사람 역시 그가 아니라 사격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의병 장승구(최무성)다. 고애신은 영웅이 될 모든 능력을 가진 ‘먼치킨’이지만, 김은숙 작가는 그의 능력치를 보여줄 뿐 정작 더 크고 어두운 세상에 좀처럼 직면하게 하지 않는다. 고애신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이제야 영어를 배우며 유진 초이에게 ‘love’의 뜻을 물어본다. 그리고 6회에는 고애신이 김희성을 꾸짖던 글로리 호텔에서 유진 초이와 구동매가 총과 칼을 꺼내 대립한다. 고애신이 뛰어난 능력으로도 무엇도 하지 못하는 사이, 두 남자는 일과 사랑이 얽혀 대립하고 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구한말은 고애신에게 새로운 자유와 기회를 줬다. 하지만 ‘미스터 선샤인’은 이 시대를 고애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 기간처럼 사용한다. 아직 일제 강점기는 오지 않았으니 신분을 포기하거나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문물을 신기해하며 배우고, 아직 남아 있는 신분제가 주는 힘을 누린다. 여성의 능력과 기개를 강조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풀어내지 않는다. 남는 것은 멋지게 총을 쏘거나 예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몇 개의 이미지들뿐이다. 그 사이는 6회 동안 암살 사건이나 미군의 잃어버린 총 문제로 만나 여러 차례의 대화로 채워진다. 이것은 ‘미스터 선샤인’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조선은, 백성은 강하고 조정은 무능하다. 그 결과 외국에서 건너온 조선 출신 외국인들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일들을 꾸민다. 조선인이 생존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더 큰 힘을 갖는 것뿐이다. 고애신에게 그러하듯, 능력을 가진 조선인들 역시 외세의 힘에 비하면 아는 것이 제한적인 이들일 뿐이다. 400억을 들인 제작비는 상당수 미국과 일본 군대의 총과 칼이 빚어내는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 쓰인다. 국가에 대한 원망과 앞선 문명과 무력을 가진 나라에 대한 동경. 그 힘을 표현하는 멋진 이미지와 대사. 그 결과 고애신도, 조선 백성들도 능력과 기개를 갖고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여성의 매력으로 전개해나간 이야기가 결국 남성의 힘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외세에 대한 저항은 어느새 그 힘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김은숙 작가가 원래 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못 나아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시대에, 여성 캐릭터를 이만큼 바꿔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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