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페미니즘│① ○○중학교 3학년 1반의 페미니즘

2018.07.24
몇 달 전, 중학교 3학년인 이채연 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와 인스타그램 소개글을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로 바꿨다. 걸그룹 에이핑크 멤버인 손나은이 찍어 올린 휴대폰 케이스를 보고 바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손나은이 페미니스트라며 네티즌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욕을 듣고, 얼마 뒤에는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사진이 찢기는 모습을 보게 됐다. “둘 다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페미니즘적’이라는 이유로 욕을 먹는 거예요. 그런데요,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장에 잘못된 부분이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요?”

이채연 학생은 올해 들어 페미니즘과 관련된 서적을 총 세 권 읽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관해 배우고 싶어서 찾아봤어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페미니스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었어요.” ‘82년생 김지영’을 가지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했다. 남녀 합반이라 거부감을 표현하는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반응은 다른 책을 소개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책 제목을 얘기하자 남자애들이 ‘이거 아이린이 읽은 책 아니냐’고만 하더라고요.” 이채연 학생과 같은 반인 김예은(가명) 학생은 남학생들에게 이 책의 내용이 잘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오히려 남자애들이 별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이 책이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고 채연이가 남자애들이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강하게 얘기한 것도 아니라서 괜찮았던 거 같고요.”

하지만 이채연 학생이 반 친구들에게 이 소설을 소개한 이유는 ‘김지영’이 겪은 일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네 학교에서는 새로 부임하신 남자 선생님이 ‘다리가 예쁘다’, ‘책상에 붙어 있는 치마 가리개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발언들을 하셨대요.”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경험은 10대 여성들에게도 있고, 그들은 옷차림이나 청결 상태에 대한 기준도 여학생이냐 남학생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됐다. “여학생들은 치마 길이, 화장 등을 항상 단속하거든요. 그런데 남학생들 바짓단은 잘 단속하지 않아요. 적용되는 교칙도 여학생이 더 많아요. 부모님은 ‘여자애 방이 왜 이렇냐’고 하시고, 선생님들 중에는 여학생들 성적에 대해서 안 좋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대부분의 어른들은 왜 여학생들에게 유독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은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고, 계속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여자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게 왜 문제시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은 허구의 상상력으로 집필된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다.

반면에 남학생들 중에는 여전히 페미니즘에서 촉발된 이슈들을 꾸며낸 일이라거나 농담거리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자 선생님들이 남자애들을 혼내면 ‘선생님, 저 미투 할 거예요!’ 이러면서 웃는 애가 있었어요. 주변 남자애들도 거기 동조해서 ‘불편하다’고 장난을 치더라고요. 여자 친구들과 놀다가 ‘너 그러다가 미투 당해’라고 말하는 애도 있어요.” 다만 그는 이런 말과 행동에 악의가 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투 운동이 왜 촉발된 것인지 설명해주거나 왜 그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지 설명해줄 필요성조차도 못 느끼겠어요.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많은 10대 남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써놓으면 걸러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여학생들이 여기에 관심을 갖는지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일상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도 잘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힘이 빠지는 것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 친구들의 모습 때문이다. “불편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이게 그렇게까지 여자로서 불편해할 일이야?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채연 학생의 주변에는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지고 있다. 김예은 학생처럼 “한국의 페미니즘은 너무 변질된 부분도 많은 것 같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하면 나를 너무 가두는 것 같아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명명하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김예은 학생은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반드시 장애인 인권운동가라고 말해야만 장애인을 존중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잖아요? 환경운동가여야만 환경 보호를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한국의 10대 여학생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페미니스트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잠시 유학 생활을 했던 김예은 학생은 페미니즘 운동 이야기를 하면서 동성애 인권에 관심을 가졌던 일을 떠올렸다. “저도 혹시 동성과 사랑하게 될지 모르잖아요. 만약에 제가 그렇게 됐을 때를 생각해서라도 인권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자애들의 경우에는 여자가 될 일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공감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요?” 여느 인권 운동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운동은 당사자성과 긴밀하게 관련된 문제다. 10대들의 페미니즘도 여학생들 스스로 얼마나 상황을 더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서예준(가명) 학생은 남학생들이 지금 상황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남학교인데 반 애들 37명 중에 1명 빼고 모두 다 페미니즘을 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어요. 그때는 진지하게 얘기했는데, 이상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면 성차별적인 농담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론적으로는 옳다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성차별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까닭에 실생활에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82년생 김지영’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어떤 남자애 부모님이, 여자애들이 독해서 남자애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거라던데요. 남자애들이 자꾸 기가 죽는대요.” 김예은 학생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 웃음에 담긴 의미를 금세 알아챈 다른 여학생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많은 여학생들이 선생님과 부모님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알고 있다. 반면에 다수의 남학생들은 현실을 소설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채연 학생은 바란다. “남학생들이 여성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변화했으면 좋겠어요. 여학생들도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미 불편함을 참기보다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학생이 더 많거든요.” 이미 변한 사람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어렵다. 지금 3학년 1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소설이 아니다.





목록

SPECIAL

image 마동석 영화

최신댓글